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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승준 Dec 16. 2024

백일

우리 집에 아기가 태어난 지 100일이 되었다. 감사하게도 햇살이는 특별한 이슈 없이 원만하게 자라고 있다.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우는 것도 대체로 다른 집 아기들에 비하면 무난하고 건강하게 지나가는 중이다. 이따금 우리 집을 방문하는 손님들, 혹은 사진과 영상을 공유받는 지인들은 그런 이유로 "아기가 참 순하네요." "효자네 효자!"라고 말을 하곤 한다.


그렇지만 매일을 함께 보내는 아빠 입장에서 그건 일부만 동의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햇살이는 온 얼굴을 활짝 펴고 웃는 아기임이 분명하지만, 어느 날 밤은 한치의 타협 의지 없이 울음과 투정으로 모든 시간을 채우기도 하고 반짝이는 뽀얀 피부를 자랑하지만, 한동안은 심각한 피부발진으로 아토피를 의심하기도 했다. 감기에 두 번 걸렸고 잘 늘어나던 몸무게의 정체가 있기도 했다.


백일이라는 짧은 기간이지만 아기의 평온한 순간이 있기까지는 수많은 굴곡과 위기가 존재했다. 햇살이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하루하루가 끔찍한 순간들의 연속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세상에 태어나서 보니 어렴풋이 듣던 두 목소리 이외엔 여기도 저기도 낯선 사람들뿐이다 누가 내 편인지 또 누가 위험한 사람인지도 모르는 상황은 스스로 볼 수도 움직일 수도 없는 존재에겐 너무도 무서웠다.


탯줄로 편안하게 영양을 공급받던 날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단시간에 빨고 삼키는 기술을 익혀야만 뭐라도 먹을 수 있었다. 냄새도 온도도 일정하지 않은 공기 속에서 폐호흡을 하는 것은 처음 겪어보는 일이었지만 연습할 여유 없이 곧바로 실전이었다. 병원에서 조리원으로 조리원에서 집으로 한 달도 되지 않은 시간 동안 두 번의 이사를 경험했고 겨우 익숙해지고 친해지려던 간호사 선생님과 조리원 선생님들과는 짠한 이별을 해야만 했다.


출근하는 아빠도 잠시 분유를 타러 간 엄마도 햇살이에게는 공간에서 영영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진다는데 그런 생이별의 순간을 하루에도 수십수 백번은 견뎌낸다. 몇 시간에 한 번씩 온 힘을 다해 엄청난 양을 먹어야 하고 기저귀가 축축해졌다는 사실도 알려야 하고 제멋대로 움직이는 사지들에도 놀라지 않고 충분한 잠을 청해야 하는 것은 아기에겐 24시간 노동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스트레스이리라 짐작된다. 그런데도 백일 케이크 앞에서 햇살이가 활짝 웃을 수 있는 것은 폭풍 같던 매일의 고된 시간을 묵묵히 이겨냈기 때문이고 그 모든 시간을 밀착하여 지켜준 엄마 덕분이다.


101일 되고 102일이 되고 16,000일쯤 산 아빠만큼 자라는 동안 햇살이의 삶은 백 일 동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어려움과 불편함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잔잔한 바다가 거대한 물결을 품은 것 같이, 포근한 봄날에 태어나는 여린 봄꽃이 시린 겨울을 지나온 것처럼 오늘의 평온함은 하나도 당연한 것이 없다.


이제는 희미해져서 잘 기억도 나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눈으로 아무렇지 않은 듯 살기까지는 내게도 끔찍한 순간들이 숱하게 있었고 어떻게든 그 시간을 견뎌내었고 그러는 동안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이들의 도움도 받았다. 눈물과 고통이 있었고 인내가 있었고 내가 잘 인지하지도 못하고 넘어간 다른 이의 희생이 있었다.  


"아이는 낳아 놓으면 어떻게든 자라!"라고 말하는 이들은 스스로 아이를 키워본 적이 없는 이들이라고 요즘의 나는 확신한다. 그냥 놔둬도 아이가 어떻게든 자랄지는 모르겠지만 인간 삶의 짧은 축소판인 듯 하루하루 빠르게 변하는 아기가 건강하게 자라기 위해서는 부모도 아이도 분 단위로 때로는 초 단위로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네게 주어진 지위도 내 곁에 있는 사람들도 건강도 한 끼 식사도 언제 어떻게 변하고 없어질지 모르는 것들이다. 지금까지의 노력과 힘든 시간으로 만들어지고 주어진 것들은 또 다른 노력 없이는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릴 수 있다. 오늘까지 햇살이가 건강한 것이 내일의 햇살이를 보장하지 않는다.


요즘 우리나라는 역사상 겪어보지 못한 초유의 사건들을 마주하고 있다. 민주주의도 안전한 국가도 건전한 경제도 생각해 보면 당연했던 것은 없다. 많은 이들의 알지 못하는 폭풍 같은 시간이 우리가 쉽게 말하는 일상이라는 것을 보증해 주고 있었다. 쓰나미 같은 파도가 밀려오고 있지만 지금의 격랑은 또 다른 잔잔함의 전주곡이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결실 없는 노력도 없다.


하루하루 안간힘을 다해 자라나는 햇살이의 날들을 응원한다. 암흑처럼 힘든 시간을 보내는 모든 국민들에게 더 큰 빛이 찾아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게 평온함이라는 이름으로 당연하게 느껴지는 모든 존재에 감사하며  당연하다 느꼈던 모든 대상에게 좀 더 예민한 감사의 표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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