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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 존중

by 안승준

쇼핑하게 될 때 아내는 진열된 물건들의 디자인을 자세히 설명해 준다. "이 옷은 얇은 가로선 줄무늬인데 밝은 파랑과 흰색이 번갈아 가면서 놓여 있어요." "이건 아기 옷인데 엉덩이 부분에 귀여운 용이 한 마리 있어요. 노란색이라 귀여운 느낌을 줘요." "이건 커다란 유부초밥인데 명란이 밥 위에 가득 올려져 있어요.“

끊임없이 이어지는 아내의 설명은 보이지 않는 내게 새로운 눈이 생긴 것 같은 감사함으로 다가온다. 다만 그녀도 사람인지라 설명과 판단은 객관적이라기보다는 다소 주관적인 경향을 보여준다. 특히 예쁘다든지 괜찮아 보인다든지 하는 호감의 표시나 그 반대되는 불호의 표시는 그녀의 취향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그런 연유로 아내를 만난 이후 내가 입는 옷이나 착용하는 물건들은 그녀의 눈으로 보기에 좋은 것들로 채워지고 있는데 그 또한 내가 추구하는 방향성이므로 굳이 객관적 판단을 다른 방법으로 시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편파적이지만 솔직한 설명은 남편인 내겐 상황을 판단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오늘은 오랜만에 자장면에 탕수육 먹을까?” “이 팔찌보다는 저게 훨씬 나은 것 같은데!!”라고, 말하는 나를 보며 아내는 어떻게 본인의 마음을 알았는지 감탄하지만 그녀의 목소리엔 이미 주관과 의지와 기호가 담뿍 담겨 있었다.

오늘 방문한 신발가게에서는 "아이고! 얼룩덜룩하고 울퉁불퉁하고 신발 디자인이 정말 특이하네. 저런 건 누가 신을까? 그래도 사는 사람이 있으니 저런 신발도 나오는 거겠지!" 라는 아내의 말에 '난 저 신발은 절대로 사지 않을 거야!'라는 결심을 했다. 그런 설명을 들은 뒤에 굳이 그 물건을 사고 싶은 마음이 들지도 않았지만, 만약 그런 스타일이 내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하더라도 아내의 마음을 얻는 것이 목적이라면 괜히 고집부리면서 그런 신발을 아내의 발에 신게 할 필요는 없었다.

우리가 그 가게를 벗어나고 있을 때 연인으로 보이는 다른 커플이 신발가게로 들어오고 있었다. “오빠! 이 신발 너무 예쁘지 않아! 정말 최고다! 최고!” 여성분이 가리키고 있는 대상은 놀랍게도 내 아내의 혹평을 받은 바로 그 신발이었다. 도대체 저런 신발은 누가 신을까 하고 돌아서는 순간 바로 그 주인공을 만난 것이다. 난 절대로 그 물건을 사지 말아야 했지만 지금 그 신발을 보고 있는 여성의 남자 친구는 웬만하면 그 물건을 사는 게 여러모로 유리할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부모님의 선물을 사려면 부모님께 필요하거나 좋아할 만한 것을 선택해야 하고 아내에게는 아내의 취향을 고려해야만 한다. 다양한 디자인의 물건이 존재한다는 것은 제조사의 소비자 요구 조사에서 그만큼 다양한 취향들이 확인되었다는 방증일 것이다.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상황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을 상대에게 권하고 선물한다. 비싼 물건이라 하더라도 내게 너무 편리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상대가 흡족해하지 않는 것은 그의 마음이 팍팍해서라기보다는 그와 나의 취향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 좀 더 설득력 있다.

아이들을 가르칠 땐 연령대에 맞는 소재와 교수 방법을 활용해야 하고 상사에게 제출할 문서는 그가 원하는 폼으로 제출해야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많은 작가의 작품이 대중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이유로 한 유명 드라마 작가는 캐릭터 설정의 실패를 원인으로 꼽았다.

대부분의 초보 작가는 극 중 등장인물의 외모나 성향에 스스로가 추구하는 이상향을 담는다고 한다. 본능적인 것일 수도 있지만 각자가 되고 싶은 모습으로 작가가 추구하는 철학을 담아 인물을 창조하지만, 그런 가상 인물은 대중들이 원하는 모습과는 거리가 있을 수 있다. 완벽한 외모의 캐릭터를 창조해 내지만 대중은 조금은 인간적인 외모에 친근감을 느낄 수도 있고 강력한 피지컬을 인물에 담아내지만, 대중은 약자에게 마음을 빼앗기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봐주는 것이 작가의 목적이었다면 그는 캐릭터를 만들기 이전에 사람들의 취향부터 조사해야 했다.

아내가 맘에 드는 선물을 사주고 싶다면 검색사이트를 여는 것보다 아내의 목소리와 표정에 집중하는 것이 낫다.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면 자기개발서를 보는 대신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살펴야 한다.

장애인들도 다른 소수들도 불편하지 않게 사는 도시를 만들고 싶다면 건축가나 디자이너를 찾아가는 것보다 당사자와 깊은 만남을 가져야 한다.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점잖은 것을 추구하는 사람도 만족할 수 있도록 신발 제조사는 여러 디자인의 신발을 만든다.

아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기 위해 난 아내의 목소리에 더 집중해야 한다. 도시를 디자인하는 사람도 물건을 만드는 모든 사람도 그랬으면 좋겠다. 보이지 않는 사람도 다리가 불편한 사람도 듣는 것이 불편한 사람도 각자 만족할 수 있는 취향 존중의 디자인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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