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픔의 공유

by 안승준

시각장애인인 나는 길을 걸을 때 다른 이의 안내를 받는 경우가 많다. 혼자 지팡이 짚고 다닐 때도 있긴 하지만 동행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의 팔꿈치를 잡는 안내보행을 택하는 것이 그에게도 나에게도 여러모로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들에게 안내를 받다 보면 특별히 말해 주지 않아도 상대의 마음이나 성격을 알게 될 때가 있다.

어떤 이와 함께 할 때는 안내를 받으면서도 나의 방어를 위해 끊임없이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고 또 다른 누군가와 걸을 때는 아무 걱정 없이 편한 마음으로 걸음에만 집중하면 된다.

계단을 오를 때도 갑작스럽게 턱이 나타날 때도 머리 높이 정도의 장애물을 지날 때도 안내해 주는 이들에 따라 나의 경계심은 극도로 높아지기도 하고 완전한 무방비 상태가 되기도 한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어떤 경우엔 차라리 혼자 가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마음이 드는 경우도 종종 있다.

보통의 사람들이 우산 같이 쓰고 갈 때를 생각하면 비슷할까?

우산의 크기에 관계없이 어떤 이와 같이 쓰는 우산은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배려에 편안함을 느끼지만 때때로 함께 하는 이에 따라서는 이러느니 차라리 비를 다 맞고 얼른 뛰어가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배려는 누구에게도 의무도 아니고 법적으로 강제된 것은 더더욱이 아니기에 시각장애인 상황 고려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안내하는 사람도 커다란 우산 들고 자기 몸 가리기만 바쁜 사람도 뭐라고 탓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극적 배려의 마음을 가지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배려를 받는 입장에서는 너무나 큰 차이를 만들고 베푸는 이의 평가도 서로 간의 관계까지도 극과 극의 간극을 만든다.

난 배려는 배고픈 어른이 이름 모를 아이에게 빵을 나누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빵의 소유권을 가진 어른은 일면식 없는 아이에게 빵을 나눠줘야 할 의무 같은 것은 없다. 더욱이 배가 고픈 상태라면 특별한 의지 없이 그런 마음이 저절로 생기지도 않는다. 힘의 크기에서도 우위에 있기 때문에 아이에게 그 빵을 빼앗길 가능성도 아주 적다.

그렇지만 그가 선의 의지로 아이에게 빵을 나누는 순간 많은 것은 달라진다.

아이는 어른의 배려로 굶주림을 덜어낼 수 있을 것이고 처음 보는 어른에 대해 고마운 감정을 느끼면서 공동체 의식을 가지게 될 것이다. 두 사람은 배가 부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최소한 둘 다 배고픈 상황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둘 다 배부른 상황보다는 좋지 않을 수 있지만 둘 다 배고프거나 한 사람만 배부른 상황보다는 낫다.

배고픔의 크기가 극단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한 공간 안에 있다면 그들은 서로를 이질적 존재로 느끼거나 적대감을 느낄 수도 있다.

반대의 상황에서 친구가 되는 것과는 정반대로 말이다.

배려는 법적 구속력을 가지는 것도 윤리적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기에 행하는 것은 큰 의지가 동반돼야 하지만 그러기에 더욱 순고하다.

차가운 법으로 인한 것보다는 따뜻한 마음에서 발하는 것이 보다 인간적이다.

혼자 빠르게 가는 것보다 느리게 걷는 친구에게 손을 내어주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비에 흠뻑 젖게 될 동료를 위해 내 어깨 한쪽 정도는 적실 수 있는 마음을 바란다.

배부름의 독점보다 배고픔의 나눔을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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