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다'라고 주문을 외우세요.

by 안승준

너무도 맛있게 먹던 사탕이 실수로 바닥에 떨어져서 부서졌을 때 아주 어렸던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았다.

더러운 바닥에서 수십 조각으로 나뉜 사탕을 다시 먹을 수는 없었기에 기껏해야 내가 할 수 있는 건 본능적으로 올라오는 감정에 충실하게 울어버리거나 아니면 강한 의지로 괜찮다는 주문을 거는 것이었다.

친구가 선물해 준 장갑 한쪽을 잃어버린 것을 알게 된 몇 해 전 겨울의 마을버스에서도 내게 주어진 선택의 폭은 그때와 다르지 않았다.

돌아올 가능성 없는 장갑에 에너지를 허비하는 것 아니면 남아있는 한쪽을 바라보며 그래도 다행이라는 최면을 거는 것 정도였을 것이다.

상실을 경험하는 인간의 감정은 언제나 허탈함과 우울함을 동반한다.

수백만 원을 잃어버렸을 때도 그렇지만 작은 소지품 하나 없어졌을 때도 특별한 예외 없이 반사적으로 같은 감정을 느낀다.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다시 돌려놓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에 대한 무기력한 허탈감과 관련한 것이다.

그러나 역으로 생각하면 되돌릴 수 없는 것이기에 에너지를 허비할 필요는 없다. 그럴 때일수록 의지적으로 괜찮아져야 한다.

사람들은 앞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면서도 즐겁게 산다고 말하는 나에게 정말 괜찮냐고 묻고는 한다.

정상적으로 동작하는 본인의 눈 그리고 그리 행복하지 않은 자신의 삶과 비교하여 내 눈과 함께하는 즐거운 삶이라는 건 당연히 거짓이라는 의심을 품는다.

그렇지만 난 실제로 나쁘지 않은 상태로 살아가고 적지 않은 시간은 미치도록 행복하기도 하기도 하다.

그건 다른 이에 비해 더 많은 상실을 경험하는 내 삶 때문이기도 하다.

난 지금도 충분히 만족한 삶을 살지만 그렇다고 해서 눈이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삶이 낫다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언제라도 내게 선택할 기회가 온다면 당연히 건강한 눈 가진 쪽을 택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건 부서져 버린 사탕이나 어느 곳에서 잃어버렸는지 모르는 장갑 한쪽처럼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영역에 있는 것이다.

난 보이지 않는 눈에 대해 매일 밤 신을 원망하고 일 년이고 십 년이고 다시 볼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 헤맬 수도 있지만 지금 그대로의 상태를 인정하고 그 상황에 맞는 최선의 만족을 찾는 쪽을 택할 수도 있다.

상실은 그 크기가 클수록 마음의 안정을 취하기가 어렵다.

그렇지만 그럴수록 더 큰 의지를 가지고 괜찮다는 주문을 외워야 한다.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굉장한 상실임에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에 대해 계속적으로 슬퍼하는 것은 인생 전체에 대한 상실이기 때문이다.

정말 다행인 것은 감정을 가진 동물인 인간에게는 괜찮다는 주문이 매우 효과적이어서 장애인인 내가 말하는 행복하다는 증언은 지금의 나에겐 진심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건대 모든 사람은 하루하루 새로운 것을 얻기도 하지만 크고 작은 잃어버림을 경험하며 살아간다.

돈을 벌기도 하지만 의도하지 않게 손해를 경험하고 나이를 먹지만 건강을 잃기도 한다.

좋은 사람들과 만남을 가지지만 소중한 관계가 끊어지기도 한다.

성취는 노력하지 않아도 익숙해지지만 상실은 의지를 가지지 않으면 지속적인 슬픔으로 남겨진다.

그렇기에 사람은 누구나 잃어버린 것에 대해 괜찮다는 주문을 외워야 한다.

사람의 행복은 물리적 상태보다는 가진 조건에 대한 인간의 의지적 멘탈 설계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

나에게 장애인도 행복할 수 있냐고 묻는 이가 다시 찾아온다면 '괜찮다'라는 주문을 알려주고 싶다.

당신도 그거 하나면 언제라도 행복해질 수 있다.

사탕이 없어도 장갑 한쪽이 없어도 내가 잘 살 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가는 길과 오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