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부터 글짓기 대회에 나가면 곧잘 상을 받아오곤 했다. 글 쓰는 일에 겁내는 법이 없었다. 내신 성적은 그냥저냥 중위권에 머물렀지만 고등학교 3학년 때 나갔던 논술 대회에서는 전국 100위 안에 들기도 했다. 고등학교를 입학할 때는 국어과목 성적 우수상을 받으며 입학했다. 읽고 쓰고 말하는 일은 나에겐 자신감이었다. 논술 전형으로 대학을 가 보려고 논술학원을 등록했는데, 대학에서 철학과 시간 강사를 하시던 선생님은 입시보다는 토론의 즐거움과 철학의 재미를 가르쳐 주셨다. 수업을 받는 학생들 중 내신 성적은 내가 가장 낮았지만 토론과 논술에서 나는 그들 모두를 이겼다.
나는 정말, 내가 글을 잘 쓴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것은 내가 받은 몇 안 되는 재능이라고 여겼다. 천재는 못되더라도 영재쯤은 되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하곤 했다. 글을 쓰겠다고 학교를 뛰쳐나왔던 스물두 살의 나는 여전히 믿고 있었다. 디자인은 나의 길이 아니었지만, 글은 내가 마음만 먹으면 누구보다 잘 쓸 수 있다고. 작은 계간지에서 수필 부문에 당선되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미치도록 뛰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그래 내가 뭐랬어' 홀로 읊조렸다.
용기을 얻은 나는 소설가를 꿈꾸며 혼자 단편 두 편을 썼지만 이미 한계를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뒤늦게 시작한 입시 준비 과정에서 나는 결국 현실과 마주해야 했다. 세상은 넓고 잘 쓰는 사람은 많았으며 그 사이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입시 시험에서 한 번 떨어지고 나니 희미하게 붙잡고 있던 나의 자신감이 와락 무너졌다. 입시 과외를 해주던 언니가 한 번만 더 해 보자고 했지만 그럴 만한 현실적인 여력도, 감정적인 여력도, 나에겐 없었다. 내가 영재가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첫 발자국이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읽으면 읽을수록 자신이 없어졌다. 왠지 멋진 글을 읽어야 할 것 같았고, 왠지 훌륭한 글을 써야만 할 것 같았던 어린 마음에는 글에 대한 미움이 싹트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또다시 오랜 시간 방황했다. 내가 가진 재능은 비루했고, 내가 가진 스펙은 전무한 채로, 아무것도 될 수 없을 것만 같은 두려움이 나를 집어삼켰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나는 흔들릴 때마다 뭔가를 찾아 읽었고, 무너질 때면 어느 순간 뭔가를 쓰고 있었다. 길지 않은 생을 살며 만난 모든 고비고비마다 나는 착실하게 읽고 또 쓰며 그 순간들을 버텨냈다. 자신감을 잃어버린 후 줄곧 도망치기만 했던 읽고 쓰는 삶을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기꺼이 다시 받아들여 보기로 했다. 내가 읽고 싶은 글을 읽고, 쓰고 싶은 글을 쓰며, 쓰는 일에 겁내지 않던 때로 돌아가 보고 싶어졌다.
다시 디자인을 하겠다고 회사를 뛰쳐나온 지 6개월이 지났다. 거친 불안의 파도가 조금씩 잦아들고 나니 이제야 비로소 진짜 나를 찾아갈 용기가 생겼다. 나는 역시, 읽고 쓰는 삶을 사랑했다는 것을, 그동안 도망만 치던 내 속에는 여전히 그에 대한 열망이 숨 쉬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받아들여 볼 용기가 말이다.
훌륭한 글을 쓰지는 못할지라도, 쓰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
무엇이 되어야겠다는 마음 없이, 그냥 읽고 쓰는 삶을 삶 자체로 즐겨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