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필연적이었을지도 모를 사건에 대하여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나는 저 말을 듣는 순간, 강의실을 뛰쳐나와 그 길로 학교를 그만두었다. 졸업을 5개월가량 남겨둔 시점이었다.
혹자는 앞의 문장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요즘 것들은…” 하고 읊조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내가 생각보다 ‘요즘 것들’인 편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보통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이 오면 글을 쓰고, 그래도 분이 안 풀리면 입을 연다.
나는 이 일화를 수도 없이 반복 발화하며 대부분의 것들을 해소한 상태지만, 나의 이야기를 하자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지점이기에 마지막으로 여기에 써 보려 한다.
지금 돌이켜 보면 다소 이해가 안 가는 선택이라고밖에 볼 수 없지만, 그때는 일련의 확신을 가지고 패션 디자인 전문학교에 진학한 것이 이 일의 시작이다.
1학년 때의 담임 교수는 프랑스인이었는데, 그녀는 종종 나를 한심함을 넘어 경멸의 눈초리로 바라보곤 했다. 사실은 나도 그녀를 딱히 인정했던 것은 아니고, 앞선 글에서 말했듯 새내기 시절의 나는 아직도 첫 이별의 늪에서 허덕이던 중이라 말도 안 통하는 여자의 차가운 눈길 정도는 내게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했다.
2학년 때의 담임 교수는 꽤 앞서갔던 타입으로, 스토리텔링의 중요성을 반복 강조하였다. 흥미로운 스토리를 입혀 가면 웬만해서 전부 컨펌을 해 주는 편이었는데, 덕분에 가장 다양한 시도를 했으며 스토리텔러로서 디자인 계열에 발 붙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기도 했다.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기도 했고.
그 교수는 학교를 다니며 유일하게 칭찬 비슷한 말을 해 줬던 사람이기도 한데, 1학기 마무리 피티 평가를 마친 후 그녀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디자인은 그냥 그런데 피티 하나로 다 먹어 들어가더라”
사실은 칭찬이라기보다는 비꼼에 가까웠으나, 어차피 내게 디자인에 대한 천부적 재능 따위는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실제로 그때의 성적이 학교를 다닌 기간 전체를 통틀어 가장 좋기도 했다.
나는 학교를 다니는 내내 디자이너 지망생으로서의 자기 효능감이라든가 이렇다 할 성취 경험을 느껴 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다녔던 학교는 과중한 과제 탓에 1학년 1학기가 끝나기도 전에 자퇴생이 우후죽순 발생하던 곳이라 재능이 부족했던 나로서는 그만하면 잘 버텼다고 볼 수 있고, 매일 밤샘을 불사하고 부모님 등골 빼먹기로 모자라 주말 알바까지 해서 재료비를 충당해야 했던 2년 세월을 버틴 이들이라면 졸업반인 3학년에 그만두는 경우는 거의 없으므로 꽤 특이한 케이스이기도 했다.
3학년이 되자 우리 학교의 교수들 중 가장 최근까지 현역에 있던 교수가 나의 담임이 되었다. 유일한 국내파였으나 현역 인맥이 상당수 존재한다는 점으로 보아 그녀의 제자가 되면 꽤 괜찮은 회사에 입김을 넣어 꽂아줄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소문이 암암리에 퍼지고 있었다. 나는 디자이너로 진로를 정할 생각이 없었기에 딱히 신경 쓰지는 않았다. 그냥 졸업장을 가지고 싶었을 뿐이었다. 아무튼 그녀는 나를 처음부터 싫어했다.
내가 밤새 해 간 과제를 내 눈앞에서 찢어 던지는 일은 우스웠다. 그녀는 매일 아침 교실 문을 열고 들어와 내 이름을 부르며 “너부터 나와”라고 협박하듯 엄포를 놓았다. 3학년이 되고부터 나는 매일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꼴이었으나, 그래도 꼬박꼬박 하라는 것을 했다. 밤을 새워서라도, 욕을 먹을지라도. 딱 한 번이라도 그녀에게 칭찬을 들어 보는 게 소원이 될 지경이었다. 이러한 일이 두 달이 넘어가자 동기생들은 나를 독하다고 했다.
“어떻게 한 번 울지를 않냐. 나 같으면 그만뒀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도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누구 좋으라고 그만둬.’
교실을 뛰쳐나온 그날도,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저 빨리 시간이 지나가기를, 어떻게든 졸업 쇼만 무사히 마치기를 바랄 뿐이었다. 심지어 그날은 해 간 과제에도 꽤 자신이 있었던 터라 오늘이라면 칭찬 비슷한 말 한마디 정도는 들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애는 썼네” 정도라도 말이지.
나는 그녀가 부르지 않더라도 가장 먼저 컨펌을 받아야지 다짐하며 자세를 고쳐 잡고 앉아 있었는데, 그녀는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오며 어김없이 내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문제의 그 말이 기어이 그녀의 입 밖을 빠져나오고 말았다.
“야, 너 과제 다 해왔어?”
“네”
“나는 네 얼굴만 보면 화가 나.”
그때까지 그녀의 패악을 겸허히 받아들였던 건, 일단 내가 디자인에 자신이 없었고, 내게 가장 큰 목표는 졸업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까지는 최소한, 내 과제에 대해서만 욕을 먹었으니 그냥 내 역량 부족이겠거니, 다시 하면 되겠거니,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밑도 끝도 없이 등장한 얼굴만 보면 화가 난다는 말은 나로서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웠다. 납득하기 어려운 것은 아무리 어른이어도, 선생이나 혹은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반박할 줄 알아야 한다고 배우며 자랐던 나는 도저히 그 말을 소화시킬 수 없었다.
방어할 틈도 없이 난데없는 폭격을 받아 들고, 그간 참았던 눈물이 일순간 터져 나오고야 말았다. 그것은 내 인생에서 '봇물 터지듯'이라는 표현이 가장 적확하게 맞아떨어졌던 순간으로, 그렇게 터져 나오는 울음을 도저히 멈출 재간이 없었다. 화장실에 틀어박혀 몇 시간을 울다 그 길로 학교를 나왔다. 그날이 내 마지막 등교날이 되었다.
그 후로 내가 학교에 나가지 않자 교수에게 전화가 왔다.
“네가 가능성이 없었으면 그 정도까지 하지도 않았다. 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그런 거야.”
이런 말은 부모나 선생이 된 자들을 모아놓고 단체 교육이라도 시키는 걸까? 더 재미있는 것은 그다음인데, 일단은 자퇴서가 아닌 휴학계를 내겠다고 했을 때의 그녀의 반응이다.
가능성이 있어서 몰아붙였다는 그녀는 갑자기 돌변해서 내게 이렇게 말했다.
“왜, 다시 돌아오려고? 넌 다시 와도 어차피 안 돼.”
나는 정말이지,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그녀가 나를 그렇게까지 무참히 짓밟아야만 했던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다. 사람이 사람에게, 선생이 제자에게, 대체 왜 저렇게까지 했어야만 했던 걸까.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 일이 없었다면 절대 그만둘 리 없었을 학교를 자퇴한 후로, 미치도록 글이 쓰고 싶어 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혹시, 그녀는 내가 쓸 용기를 내는데 반드시 필요했던 시련이었던 것은 아닐까?
실제로 학교를 그만두고 몇 달 뒤에 수필 공모전에 당선되기도 했는데, 그것은 차치하고서라도 그 일 후로 나는 줄곧 쓰는 삶을 갈망하며 주변을 배회해왔다.
그러니 사건이라고 명명되기에 충분한, 나의 ‘졸업반 자퇴 사건’은 사실 단순한 실패나 좌절이 아니고, 내 세상의 균형이 무너지고 새로운 페이즈로 넘어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필연적 시련일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내가 만약 등단이라도 하게 된다면, 혹시 내가 쓴 글로 인해 인터뷰라도 할 기회가 생긴다면, 난 이 모든 것이 그녀 덕분이라고 말해 줄 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