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삶이 되기를.
읽고 쓰는 삶을 지향한다는 말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사실 나는 자타가 공인할 만한 다독가도 아니고 안 쓰고는 못 배겨서 매일 밤 빈 페이지를 열고 끙끙대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언제든 눈 깜짝할 사이에 읽고 쓰는 삶에서 멀어질 수 있다. 그럼에도 뻔뻔하게 읽고 쓰는 삶을 운운하는 이유는, 적어도 궁지에 몰린 순간만큼은 읽고 쓰는 일이 전부가 되기 때문이다.
첫 이별이 남긴 찝찔한 심해를 허우적거릴 때도, 몸과 마음이 다친 채로 학교를 등지고 돌아서던 순간에도, 그 외에 크고 작은 시련이 나를 관통할 때마다 누가 시키기라도 한 것처럼 책 속으로 달려가 숨었고 밤에는 하얀 창을 열고 글을 썼다. 작가가 되고 싶다거나 글 쓰는 일로 밥 벌어먹겠다는 꿈조차 꾸지 않을 때였으니 오히려 더욱 순수한 의미의 쓰기였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쓰는 행위를 통해 절망의 모든 구렁을 빠져나왔다. 쓰기의 끝에는 언제나 빛이 있었다.
몇 차례 쓰기를 통한 극복의 경험이 반복되자 시련이 왔을 때 애써 그곳을 빠져나오느라 허겁지겁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더욱 깊숙한 곳으로 침잠했다. 그 시간이 조금은 좋았던 것도 같다.
한 차례 폭풍이 지나간 뒤에 다시 햇볕을 마주할 때면, 또 한 뼘 성장했다는 성취감을 그러안고 남몰래 자위하기도 했다. 얼마 안 가 나는 또 넘어졌으므로 사실 쓰기를 통해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어느 순간, 어쩌면 쓰는 일이 나의 길인 것은 아닐까 하는 기대의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고 있었다.
그 후로 나는 쓰는 일이 전부라고 굳게 믿었다가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일을 지속적으로 반복하였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궁지에 몰리면 읽고 쓰는 삶으로 도망치고, 그때마다 쓰는 일이 어쩌면 운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살만해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절망의 구렁에 읽고 쓰는 삶을 두고 나오고, 그때마다 쓰는 사람이 될 제목이 아니라고 스스로 확신한다. 가끔은 쓰는 일이 꼭 첫사랑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가 꿈에 나올 때마다 그가 나의 운명이라고 믿었지만, 결국 그것은 내가 만들어낸 망령에 지나지 않았던 것처럼, 쓰는 일도 어쩌면...
그래서 요즘은 삶으로서의 읽기와 쓰기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은 사실 타인으로부터 쓰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다는 소리다. 그러나 인정을 받든 받지 못하든, 무엇이 되든 되지 않든,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함께하는 삶으로서의 읽기와 쓰기를 추구해 보려 한다.
조용히 숨어들었다 살금살금 빠져나오는 도망자 신세에서 이제 그만 벗어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