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6일 목요일

출근

by 감우
행복은 예측할 수 없을 때 더 크게 다가오고,
불행은 예측할 수 없을 때 감당할 만하다.



회사 다닐 때는 일이 익숙해지고 나면 업무 수행 시간이 줄어들면서 조금씩 여유가 생겼는데, 서점 일은 어쩐지 일이 익숙해질수록 바빠진다. 혼자 일하는 날은 카운터를 오래 비우기 어렵기도 해서 되도록 일을 만들어서 하지는 않으려고 하지만, 신간을 꽂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서가 정리를 시작했고, 이쪽에서 저쪽으로 책을 들어 나르며 오늘도 그만 열일하고 말았다.


그래도 마감 30분 전쯤부터는 <스토너>를 조금 읽기 시작했다. '미생'을 다 보고 잠시 영상 휴식기에 들어갔다. 영상을 보던 시간에 [윌라] 오디오북으로 <열두 발자국>을 듣고 있다. <열두 발자국>은 '알쓸신잡'으로 얼굴을 알린 정재승 박사의 강연을 편집해 책으로 만든 것인데, 서점에서도 쏠쏠히 팔리는 책 중 하나다. 자연과학 코너가 있는 층에서 일을 시작한 덕에 생전 관심 없던 과학서의 매력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처음에는 문학 코너에서 일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요즘은 오히려 관심 없던 분야를 담당하게 된 것이 행운처럼 느껴진다.


<열두 발자국>은 구어체로 쓰인 책인데 그것을 오디오북으로 들으니 정말 강연을 듣는 기분이다. 오디오북 전용 플랫폼인 [윌라]는 녹음 퀄리티가 상당히 좋은 편이라 돈이 아깝지 않다. 완독 할 엄두가 안 나는 책이라거나 소장할 가치는 없다고 판단되는 책, 살지 말지 고민되는 책을 오디오북으로 들으면 높은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


그래도 역시 책은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읽는 맛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자책은 몇 번 시도해 봤지만 역시 나와는 맞지 않다는 결론이다. 책을 읽으며 가장 행복한 순간은 읽은 페이지의 수가 읽을 페이지의 수를 넘어서는 순간이다. 남은 페이지 수가 적어질수록 어쩐지 독서에도 더욱 탄력이 붙어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며 밤을 패서 읽게 되는 것이다. 두꺼운 책을 싸 짊어지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면에서 분명 장점이 있기도 하지만, 역시 나는 아니올시다!


문학은 답이 없는 문제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장르라면, 과학은 답이 없는 것 같은 문제에 답을 내려주는 장르다. 그러니까 문학과 과학서를 번갈아 읽으면 결핍 없는 독서 생활이 가능하다는 소리! <열두 발자국>을 재미있게 듣고 있는 중이라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오늘 창을 켰는데, 막상 그에 대한 글을 쓰려고 하니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이래서 책은 역시 종이 책으로 읽어야 한다니까!)


오늘의 글머리 문장도 <열두 발자국>의 문장인데, 들으며 기억해 두었다가 출근하자마자 책을 뒤져 메모해 두었다. 해당 문장은 '우리는 왜 미신에 빠져드는가'라는 주제에서 등장했는데 실험으로 입증된 과학적 사실이니 의심은 하지 말 것! 결국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미신을 믿지 말고 불확실성 그 자체를 감사히 여기며 즐기라는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미래를 예측하고 통제하려 하지만, 그것은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가능하다 하더라도 불행과 한 걸음 더 가까워질 뿐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저자는 말한다. 기꺼이 실패해야 한다고. 실패와 극복의 경험치가 쌓여야만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고. 따지고 보면 실패와 성공은 그저 관점의 차이일 수도 있다. 원래 가려던 길과 다른 길로 가게 되었다고 이것을 실패라고 여기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지금 길 위에 있는 것뿐이다. 옆사람과 가는 길이 다르다는 이유로, 앞사람과 목적지가 다르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실패자로 만드는 짓은 이제 그만하자. 한 치 앞도 모르는 인간의 한계에 심심한 감사를 보내며, 발 뻗고 잠이나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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