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16일 일요일

<스토너>_“넌 무엇을 기대했나”

by 감우
그는 방식이 조금 기묘하기는 했어도, 인생의 모든 순간에 열정을 주었다. 하지만 자신이 열정을 주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했을 때 가장 온전히 열정을 바친 것 같았다. (...) 상대가 여성이든 시(時)든, 그 열정이 하는 말은 간단했다. 봐! 나는 살아 있어.

<스토너>_350p


오늘은 서점 일을 시작한 이래로 가장 한가로운 날이었다. 그렇다고 매출이 가장 적은 날은 아니었는데, 오늘 휴무인 M이 내가 휴무였던 금, 토 이틀 동안 온갖 잡일을 전부 끝내준 덕분에 카운터에 가만히 서서 계산만 해 주면 되었기 때문이다. 서점에서 계산 업무는 지극히 사소한 영역으로, 이런 일이 가능한 날은 극히 드물다고 할 수 있다. M의 부지런함 덕에 나는 오늘 서점에서 누릴 수 있는 최대치의 여유를 누리며 절반도 채 읽지 못했던 <스토너>를 완독 할 수 있었다.


<스토너>는 1965년 출간되었으나 판매 부진으로 이듬해 절판되었다가 한 서점 주인의 권유로 재출간되어 일약 스타덤에 오르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스토너>라는 책의 서사가 <스토너> 속 스토너라는 인물의 삶과 닮아 있다는 점은 우연일까, 운명일까.


온라인 서점에 <스토너>를 검색해 보면 전 세계 다양한 작가들의 찬사 어린 추천사가 줄지어 나열되어 있다. 보통 ‘작가들이 좋아하는’따위의 수식어가 붙은 책들은 유달리 지난하고 집요하며 지독한 구석이 있다. 좁고 어두운 길을 따라 더욱 깊고 낮은 곳으로 침잠해갈 때, 희미한 진실의 불빛에 조금이나마 가까워지기 때문일 거라고 짐작해 본다.


<스토너>가 꼭 그런 책이었다. 유달리 지난하고 집요하며 지독한 구석이 있는 책. 작가는 무색무취의 형상과도 같은 ‘스토너’라는 인물의 일생을 집요하게 쫓으며 독자로 하여금 기어이 마지막 순간을 목도하게 만든다. 마지막 십여 페이지를 내 책상에 앉아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읽는 내내 뻐근하고 답답했던 마음은 마지막 순간 결국 눈물이 되어 터져 나왔다. 처음에는 휴지 몇 칸을 뜯어다 눈물을 훔치기 시작했는데, 머지않아 휴지를 통째로 들고 오게 만들더니 결국엔 자려고 누웠던 남편이 달려 나오는 사태까지 가고 말았다. 그 후로도 한참을, 멈춘 줄 알았던 눈물이 다시 터지고 또 터지길 여러 번 반복했다. 그러나 눈물의 이유가 그의 삶이 ‘불쌍해서’는 결코 아니다. 누구도 감히 스토너를 동정할 수는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 그다지 존경받아 마땅한 인물은 아닐지도 모르나 동정을 필요로 하는 인물은 더더욱 아니다.


생에 대해 생각해 본다. 피어나고 발화하였다가 서서히 스러지는 생에 대해.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스스로를 부정했다 긍정하기를 반복하고, 풍요와 빈곤 사이를 쉼 없이 오가며, 충만함 사이로 결핍의 싹이 돋아나는 것을 목도한다. 이 끝에서 저 끝으로 분주하게 내달리는 와중에도, 한 발 물러나 세상을 바라보면 모든 것은 미동 없이 고요하게, 원래의 자리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끊임없이 변주하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일 뿐, 세상은 아니다.


“나는 그가 진짜 영웅이라고 생각합니다.”

<스토너>의 작가 존 윌리엄스가 스토너를 두고 한 말이다. 마지막 장을 덮고 한참을 울고 나서야 비로소, 나도 이 말에 동의할 수 있게 된다. 세상을 구하는 것만이 영웅은 아니다. 생을 구하는 것, 스스로의 생을 구하는 것, 이 또한 영웅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스토너의 영웅적 면모는 언제나 인내와 침묵에서 비롯된다. 아무런 꿈도 희망도 없이, 산다기보다는 견디는 것에 가까운 모양새로 죽지 못해 사는 듯 보이지만, 사실 스토너는 발악적인 에너지를 동원하여, 모든 순간에 열렬한 열정을 내어주며 생의 길을 걸어간다. 모든 희망이 좌절된 순간에도 꿈과 희망으로 충만했던 날과 다름없는 보폭으로 묵묵히 나아갈 뿐이다. 자신이 내린 모든 선택에 기꺼이 책임을 지며, 그 어떤 생색도 변명도 없이, 그저 묵묵히, 앞으로, 앞으로. 단 한순간도 생으로부터 도망치지 않았던 사람. 그 어떤 무자비한 상황 속에서도 망설임 없이 오직 전진만을 감행한 사람. 그렇게 모든 에너지가 고갈되어 단 한 발짝도 떼지 못하게 되는 순간까지 결코 멈추는 법이 없었던 사람. 이런 사람을 그 누가 영웅이 아니라고 할 수 있나.

자신의 생 하나를 구하기 위해 그가 걸어온 길이 너무나 처절하여 참을 수 없이 애달프다.


스토너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마지막 질문이 오래도록 내 마음을 울릴 것 같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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