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책을 소유하게 되기까지, 우연히 마주하는 운명적 순간들
서점에서 일하며 가장 좋은 점은 서점원이 되지 않았다면 영영 모르고 지나갔을 만한 책들을 매일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편독 성향이 좀 심하기도 하거니와 한 장르에 꽂히면 한동안 그 장르만 읽어대다 보니 읽기의 저변이 좀처럼 넓어지기 어려운데, 원치 않아도 밀려드는 신간을 포함하여 나의 취향과 상관없이 접하게 되는 수많은 책들이 나를 전혀 예상치 못한 길로 데려다주는 일이 많아졌다.
오늘 구매한 책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도 그렇게 만나게 된 경우다. 이 이야기는 지난달 신간으로 들어온 희곡집 <르 몽스트르>에서 시작된다. 아담하지만 단단함이 느껴지는 맑은 레드 컬러의 양장본 희곡집은 기존에 서점에서 보유하고 있던 희곡집들과는 다르게 매우 세련된 인상을 풍겼으므로, 희곡집을 즐겨 읽지 않으면서도 왠지 소장 욕구를 일으키는 그런 책이었다. 그러나 서점에서 일하다 보면 '왠지 소장 욕구를 일으키는 그런 책'은 셀 수 없이 많으므로, 그것이 구매의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그러니까 일단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그로부터 얼마 뒤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구매했고, <르 몽스트르>의 추천사를 쓴 사람이 바로 대상 수상자인 <모래 고모와 목경과 무경의 모험>의 저자 '이미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쯤에서 <르 몽스트르>를 살 수도 있었지만 아직 '이미상'의 작품을 읽기 전이었으므로, 한 번 더 신중해지기로 했다. 대신 M에게 이런 선언을 했다. "대상작이 제일 좋으면 저 책 바로 사려고요."
그러나 아쉽게도 나는 대상작이 제일 좋지는 않았고, 그러니까 추천사나 읽어보고 <르 몽스트르>에 대한 미련을 버리기로 결심하던 찰나에 이 문장을 만난 것이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작품을 인생작으로 꼽는 작가들이 워낙 많다 보니 블라블라블라"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대충 이런 느낌의 문장이 포함된 추천사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뭐야 지금,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작품을 읽어보지도 않았으면서 주제넘게 희곡집을 기웃거리고 있는 거야?"
카운터로 돌아와 곧바로 작가의 이름을 검색했더니 제일 위에 뜬 책이 바로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었다. 제목을 보는 순간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대번에 떠오르며 읽지도 않은 책에 애정이 샘솟기 시작했는데, 오늘 책을 받아 펼쳐 보니 작가 소개글에 이런 문장이 있는 것 아닌가. '3부작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발표함으로써 또다른 유럽 작가인 밀란 쿤데라에 비교되는 주목받는 작가가 되었다. '
이쯤에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속 한 문장을 인용하지 않을 수 없겠다.
우연만이 우리에게 어떤 계시로 나타날 수 있다. 필연에 의해 발생하는 것, 기다려 왔던 것, 매일 반복되는 것은 그저 침묵하는 그 무엇일 따름이다. 오로지 우연만이 웅변적이다. (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