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5월 15일 월요일

한국이 싫어서

by 감우

5월은 어쩌다 보니 소설의 달이 되었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서점에 꽁으로 굴러들어 온 <딥뉴스>, 민음 북클럽 신청 도서로 선택한 <한국이 싫어서>를 완독 했다. 5월에서 딱 절반이 지났는데 벌써 세 권을 읽었으니 평월 대비 높은 완독률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오늘은 아고타 크리스토퍼의 희곡집 <르 몽스트르>를 사가지고 퇴근했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정도는 아니더라도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겼기 때문이다.


몇 번의 이사와 몇 번의 서가 정리를 거듭하며 소장할 만한 책과 소장 가치가 없는 책을 구분하는 나름의 기준이 생겼다. 그 기준에서 가장 중점을 두는 부분은 재독의 가치가 있는가이고, 또 하나는 재독 시 새로운 자극이 될 만한 여지가 있는가이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었던, 아무리 재미있게 읽은 책이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소장할 만한 것은 아니다. 책은 몇 권만 모이더라도 무게가 상당해서 처분이 쉽지 않기 때문에 더욱 신중해야 한다. 나는 책을 엄청 많이 사는 편은 아니고, 그렇다고 아주 적게 사는 편도 아닌데, 한 권 한 권을 나름 엄선하여 구입하려고 노력하고, 지금까지는 서가를 제법 알차게 꾸려가고 있다고 느끼지만, <한국이 싫어서>는 약간 실패인 것 같다. 아주 오랜만에, 한 호흡으로, 하루 만에 읽어치운 책이지만, 그것이 반드시 소장할 가치가 있다는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이 싫어서>는 민음사 북클럽 신청 도서를 선택할 때에도 마지막까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책이었고, 순전히 장강명이라는 작가에 대한 호기심으로 선택한 것인데, 읽는 내내 묘하게 불편한 감정이 지속적으로 스며 올라왔다. 그것은 어쩌면 시작부터 잘못되었던 건지도 모른다. 나는 ‘한국이 싫어서’라는 말을 매우 싫어하는 사람이니까. 그건 내가 애국심이 강하여서는 결코 아니고, ‘헬조선’따위의 자조적 표현을 마주할 때마다 ‘그럼 국경 너머에는 유토피아라도 기다리고 있다디?’라든가, ‘여기서 그런 말을 하는 네가 외국에 나가면 그건 또 뭐 그리 대단히 좋을 것 같니?’하는 반항 심리가 발동하기 때문이다.


가끔 나 자신이 어딘가 단단히 결핍되기라도 한 것처럼 비관과 냉소에 찌들어 있는 것 같다가도 또 가끔은 좀 이상할 정도로 낙관적이라고 느낀다. 나는 ‘평등’이라든가 ‘공평’이라든가 하는 말을 전혀 믿지 않고, 그러한 아름다운 개념은 인간이 이루어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믿으며, 그래서 나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평등‘이나 ’공평‘을 부르짖는 사람들이 가끔은 뻔뻔한 태도로 ’차별‘과 ’특권’을 주장하는 사람들보다 미덥지 못하게 느껴진다. 어쩌면 나의 이러한 성향이 한국을 싫어하지 않게 만드는 동력인지도 모르겠다. 일장일단이라는 진리의 대전제를 벗어날 수 있는 곳이 지구 안에 있을 리 만무하다. 나는 한국에서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 다른 곳에서는 만족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러니까 나는 그냥 태어나보니 한국인인 것일 뿐, 한국이 그다지 좋거나 싫지도 않고, 국가를 원망하지도 국가에 감사하지도 않는다. 나는 한국의 이러저러한 시스템 때문에 내가 필패하고 말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고, 한국이 아닌 다른 곳이라면 필승이 보장된다는 생각은 더더욱이나 해본 적이 없다.


<한국이 싫어서>는 작가가 정확히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잘 파악되지 않는 책이었다. 유별나게 풍족하지도, 또 유별나게 부족한 것도 아닌 그저 보통 사람 ‘계나‘가 피해의식에 찌들어 국경 밖으로 도망치듯 뛰쳐나가는 모습을 비판하고 싶은 건지, 타국으로 쫓기듯 내몰려야 하는 계나와 같은 청년들을 끊임없이 생산해 내는 헬조선을 고발하고 싶은 건지, 아니면 그냥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인간 유형으로 ‘계나’라는 인물을 만들어낸 뒤 어떤 현상 그 자체를 조명하고 싶었던 건지, 결국 고개만 갸웃거리다 마지막 장을 덮었다. 책을 읽는 내내, 결론도 없는 불평불만을 끝없이 쏟아내는 친구와 이야기를 나눈 듯한 기분이 드는, 감정적으로 다소 피곤한 책이었다는 결론이다. 그런데 오늘 이 글을 쓰다 보니 작가의 의도가 바로 이런 비판적 사색을 유도한 것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이 싫어서’ 호주로 간 계나는 그곳에서 한국에서보다 더한 개고생을 하고, 그러나 결국엔 살아남는다. 당신은 한국에서 살 수도 있고 한국을 떠날 수도 있지만, 어디에도 당신이 생각하는 천국 같은 건 없다. 그러나 당신은 어느 쪽이든 선택할 자유가 있다. 바로 그것이 당신이 가진 힘이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어떤 선택을 할지에 대해 같이 고민해 보자.” 하고, 말을 걸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오늘의 마지막 문장이 이렇게 끝날 거라고는 스스로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어쩌면 <한국이 싫어서>가 실패한 선택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드디어 돌아온 휴무 전야제! 오저치고 바이브



화, 수는 쉽니다. 목요일에 만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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