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이야기

그녀에게 받은 유산

by 감우

우리 엄마는 사실 꽤 괜찮은 엄마다. 딱히 극성 엄마 타입은 아니었고, 꽤 쿨한 편이었던 데다, 내 이야기를 대체로 잘 들어주었는데, 모든 대화의 마무리를 교육적으로 해야만 한다는 강박이 살짝 있긴 했다. 엄마는 먹는 것, 입는 것, 말하는 것, 쓰는 것, 아무튼 살면서 하는 모든 일에 '그냥'은 없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즉흥적인 엄마를 가진 친구는 내가 부럽다고 했는데, 나는 친구의 즉흥적인 엄마가 부러웠다. 조금은 생각 없어 보이고, 가끔은 좀 귀엽기도 하고, 어딘가 좀 모자라 보여서 내가 챙겨줘야 할 여지가 있는, 때론 아이처럼 기분 따라 즉흥적으로 모험을 시도하기도 하는 그런 엄마가 가지고 싶었다.

그래도 우리 엄마에게는 확실한 장점이 있다. 어떤 비극이든 이상하게 엄마와 이야기를 하다 보면 묘한 블랙 코미디 장르로 뒤바뀌어 낄낄대며 웃게 된다. 나는 그런 순간의 우리가 참 좋았다. 엄청 심각하고 혹은 비참하고 때론 슬픈 이야기들을 하며 낄낄대던 우리의 순간들이 참 좋았다.


우리는 함께 있으면 언제나 웃었다. 때론 울기도 했지만 결국엔 웃었다. 아빠가 바람이 났을 때도, 오빠가 사채빚을 끌어다 써 전화선을 모두 뽑아둬야 했을 때도, 돈이 없어 보일러를 틀지 못하던 겨울밤에도, 60평 아파트에서 15평 빌라로 이사를 가게 됐을 때도, 나의 부모가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이혼을 하게 됐을 때도, 우리는 자조적인 유머를 남발하며 낄낄거렸다. 모든 일에 '그냥'은 없다고 믿는 사람답게 어떤 비극적인 일을 겪더라도 어떻게든 배울 점을 찾아내어 "야 우리 이거 배웠다!"하고 자랑스레 말하는 식이다.


나는 엄마와 꽤 친밀한 관계이면서도 연락을 자주 주고받지는 않는다. 우리는 용건이 있을 때만 연락을 하자고 서약이라도 한 것처럼, 별일 없이 그냥 하는 연락 같은 것은 결코 없는 채로 지낸다. 오늘은 오랜만에 엄마와 통화를 했다. 연락을 자주 하지 않는 대신 한 번 전화통을 붙들고 나서면 한 시간은 우습게 지나간다. 통화를 하다가 엄마가 만으로 65세가 넘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 엄마도 이제 나이를 많이 먹었네, 세월 참..! 생각하고 있는데 엄마가 말한다. "나 이제 지하철 공짜로 탈 수 있다? 대박이지." 엄마는 노령 연금도 신청해 뒀다고 자랑한다. "야 우리나라 복지 장난 아니야. 짱 좋은 나라야." 한다. 노령 연금은 조건이 까다로워 심사가 끝나야 결과를 알 수 있다고 했다. "엄마는 참 야무진 할머니가 될 거야." 했더니 깔깔대며 "당연하지!"하고 좋아한다.


'노인네'라는 표현이 사전적 정의로는 늙은이를 얕잡아 부르는 표현이라지만,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노인이 되면 다시 애가 되거든. 그래서 노인네라고 하는 거야." 나는 어쩐지 그 말이 맞는 것 같아 사전보다는 엄마 말을 믿기로 했다. 우리는 가끔 엄마의 엄마 그러니까 나의 할머니를 이야기하며 "하여튼 그 노인네"따위의 표현을 서슴없이 써재낀다. 엄마가 엄마의 엄마에게 그러듯, 나도 가끔은 엄마가 좋고 가끔은 엄마가 싫다. 나는 딱히 엄마 같은 사람이 되어야지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엄마에게 "난 절대 엄마처럼은 안 살 거야."하고 싸가지도 없이 선언하는 쪽이다.

그래도 비극을 희극으로 바꾸는 기묘한 마법은 누가 뭐래도 역시, 엄마가 나에게만 물려준 유산이다. 그 비기를 전수받은 것만으로도 나는 엄마에게 무한한 감사를 보내야 마땅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엄마를 보고 있으면 나이 드는 것도 두렵지 않아지고, 딱히 비참해질 일도 없어 보인다. 우린 모든 비극을 희극으로 바꾸는 비법을 알고 있으니까, 어떤 비극이 오더라도 겁낼 필요가 없다. 우리는 모든 비극 앞에서 천하무적이다.


휴대폰에서 내뿜는 열기로 귓가가 뜨거워질 때쯤, 나는 말했다. "아무튼 엄마, 노령연금 합격하면 꽁철이 타고 와서 한 턱 쏴!" 엄마는 또 낄낄 웃으며 "알았어 알았어"하더니만, 앞으로 또 한참을 연락할 일 없을 거라고 선언이라도 하는 것처럼 "잘 지내"하고 마지막 인사를 한다. "응 엄마도 잘 지내." 하고 전화를 끊는다. 전화를 끊고 오늘의 첫 문장을 떠올렸다. 우리 엄마 정도면 꽤 괜찮은 엄마지, 암!암! 혼자 읊조리며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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