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생각해 보면 어떤 일을 잘하고 싶은, 잘해야만 한다는 부담 어린 마음들이 벽을 이루어 내가 가는 길을 미로로 만들어 버린 것 같다. 그렇게 나는 길을 잃은 걸까? 분명 잘하고 싶었고, 잘하려고 했는데, 이제는 무엇을 잘하고 싶었는지, 무엇을 잘하려고 애썼는지조차 잘 모르겠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 페이지는 여전히 백지인 채로, 내가 잘할 수 없는 일 페이지만 책 한 권을 이루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이런 걸까? 잘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일은 점점 줄어들고, 만사가 자신 없어지는 게 바로 어른들의 세상인 걸까? 그래서 창조력을 키워 준다는 책들을 보면 하나같이 “내면의 아이를 찾으세요.”같은 소리를 해대는 걸까?
생각해 보면 조금 우습다는 생각이 든다. 어릴 때는 그렇게 어른이 되고 싶다고 발을 동동 구르다가, 이제는 다시 아이가 되겠다고 설쳐대는 꼴이라니. 결국 인간은 가진 것에 결코 만족할 수 없다는 사실만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까 이제 어른이 되고 싶다거나 아이가 되고 싶다는 등의 현실 도피적인 발언은 지긋지긋하다. 내가 발작적으로 미래나 과거를 향해 튕겨져 나가던 순간순간마다 내 안의 내가 바깥의 나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 같다.
“제발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를 좀 사랑해 주면 안 되니? 너는 내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 미치겠는 거니? “
어린아이들은 다 그림을 그려
류승범의 아내가 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정말 어린아이들은 왜 전부 그림을 그리는 걸까? 답은 의외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그때는 없고 지금은 있는 것들이 있다. 잘해야 한다는 마음과 못 하면 부끄러운 마음.
그때는 있고 지금은 없는 것들이 있다. 아무리 개떡같이 그려놔도 손뼉을 치며 좋아하던 주변 어른들의 칭찬과 환호.
아이가 가졌던 조건들은 지금도 얼마든지 충족시킬 수 있다. 내 마음은 내가 바꾸면 그만이고, 칭찬도 내가 해 주면 그만이니까. 굳이 잃어버린 나를 찾는다는 둥, 내면의 아이를 찾는다는 둥 하며 모험을 나서지 않더라도 우리는 지금 당장이라도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안 하는 거지 못 하는 게 아니라는 소리다.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면, 그때부터는 내가 주도권을 쥘 수 있다.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결정만 하면 된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며칠 전 <날씨의 아이>라는 애니메이션을 봤다.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나도 모르게 이렇게 외쳐 버렸다. “뭐야, 결국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잖아!”
그때는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지금은 꽤 괜찮은 결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은 순간에도, 어쩌면 전보다 더 나빠진 것 같은 순간에도, 분명 뭔가는 달라져 있다. 그리고 그 미묘한 변화가 ‘꽤 괜찮은 것 같기도?’ 생각하게 되는 순간, 삶은 계속 이어진다.
[잃어버린 나를 찾습니다]라는 다소 황당한 제목을 내걸고서 마냥 게으름을 피우며 쓰기를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던 본 매거진도 얼렁뚱땅 끝이 가까워졌다. 결말에 다다를수록, 이 글을 시작할 때 가졌던 꽤나 절박했던 마음이 어느새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는 자각이 확신으로 바뀌어간다. 잃어버린 나 같은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설사 있었다 한들 그런 나 같은 것은 더 이상 찾지 않겠다고, 조용히 다짐하고 있는 내가 여기에 앉아 타자를 치고 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는, 과거의 나 혹은 미래의 나 같은 존재하지도 않는 나를 갈망하기보다, ‘지금의 나도 꽤 괜찮지 않아?’ 스스로를 다독이며 현재의 나와 함께 길을 걸어 볼 생각이다. 이 글의 결말이 누군가에게는 “결국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잖아!” 짜증스러운 외침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겠지만, 분명 뭔가가 달라졌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리고 그 변화가 꽤 괜찮은 것 같다.
재미있는 것은 본 매거진의 프롤로그에 썼던 무지개를 찾아 떠난 소년 이야기가 현실이 되었다는 점이다. 어쩌면 정말 무지개는 처음부터 내 주머니에 들어 있었던 걸까? 그러나 역시, 무지개를 찾아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 사실도 영영 몰랐을 테니, 후회는 없다. 나의 진짜 모험은 지금부터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