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12. 월
경쟁을 해야만 하는 순간이라면 좌우지간 최선을 다해 싸우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경쟁 상황을 즐기는 승부사 타입은 아니다. 굳이 타입을 나누자면 이길 판을 짜두고 이길 싸움을 하고자 하는 전략가 타입에 가까울 것이다. 경쟁을 즐기지 않는다는 것이 승부욕이 없다는 이야기는 아님을 분명히 해 두자. 나는 언제나 이기고 싶다. 승리에 대한 열망으로는 질 자신이 없을 정도다.
그러나 오늘 문득, 내가 경쟁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나의 경쟁 기피 현상의 역사는 학창 시절부터인데, 맞부딪쳐 이길 자신은 없을 때, 그러나 싸움에서 지고 싶지는 않을 때, 나는 늘 판 자체를 엎어버리는 선택을 했다. 그렇게 나는 때때마다 아주 엉뚱항 방향으로 튀어나가며 내 인생을 스스로 열심히도 꼬아왔다. 그 결과 나는 아주 괴상한 스펙과 기묘한 경력이 어우러진 요상스러운 사회인이 되었다.
티처스 정주행을 마쳐서 조만간 내가 경험한 사교육 시장과 대입 과정에서의 사건들을 정리해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는데, 일단 그것은 차치하고 결론만 간략히 요약해 보자면 나는 패션디자인을 전공했으나 최종 학력은 고졸이고, 수필 공모전에 당선된 적이 있으나 자의에 의해 당선을 포기하였으며, 호주 워홀을 떠난 경험이 있으나, 호주 체류 기간은 고작 3개월이었고, 쇼핑몰에 입사했으나 글로벌 대기업에서 퇴사를 했으며(이건 딱히 내 선택에 의한 것은 아니었지만), 최저시급도 못 받는 서점원이었다가 사장이 되었다. 엉뚱한 방향으로 튀어나가 괴상스러운 스펙을 가지게 된 각 분기점의 계기는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 경쟁 기피에서 비롯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플로팅을 하면서도 비슷한데, 옆집에서 그릇을 팔고 있으면 나는 잘 팔던 그릇 판매를 일순간 접어버리고 일말의 미련도 없이 다른 상품으로 그 자리를 채우는 식이다. 똑같은 그릇도 아니고, 결도 완전히 다르고, 딱히 경쟁 상대라고 생각하지 않는데도, 그냥 그 상품이 팔고 싶지 않아 진다. 만약 내가 먼저 시작한 아이디어를 누군가 따라 하는 일이 생기면, 나는 선후관계를 따져 묻고 내 권리를 주장하기보다 '됐으니까 너나 실컷 가져라'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골몰한다.
나의 이력이 다소 많이 괴상해지긴 했을지언정, 아무튼 엉뚱한 방향으로 튀어나간 선택의 결과는 늘 이전보다 나은 방향으로 전개되었으므로, 지금껏 나의 이러한 성향을 회피나 도망이라고 여겨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오늘 문득, 내가 도전이라 여겼던 모든 선택들이 사실은 도망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솔직히 나는 '도망'이라는 개념에 큰 거부감이 없는 편이고, 도망쳐야 할 순간에 도망치지 않고 버티는 것은 오히려 미련한 처사라는 입장이며, 죽지 않고 살아 있는 한 A로부터의 도망은 B와의 직면으로 이어지는 것이 대부분이므로, '도망'이라는 단어에 매몰된 사람들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나의 선택들이 '도망'이었더라도 나 자신이 싫어질 일은 없을 테다. 그러나, 그렇기에 더더욱, 조금 더 확실히 해 두고 싶다. 나의 선택들은 도망이었을까, 도전이었을까. 오늘부터 고민해 볼 일이다.
이 타이밍에서 떠오르는 또 하나의 의문. 사실 '도망'과 '도전'은 유의어였던 게 아닐까? 도망을 죄악시하는 사회에서 살아남느라 '도망'의 정의에 대해 제대로 탐구해 보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정말 한 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오늘 새로 그린 거울. 아니 근데 생각해 보니까 요즘 플로팅에서 최선을 다해 밀고 있는 문장, "UNHIP but not UNCOOL"도 위에서 설명한 나의 성향이 반영되고 있다. 옆집에서 그릇 팔면 갑자기 그릇 팔기 싫어지는 것처럼, 남들이 우르르하면 나는 그거 딱 하기 싫어진다고! 그렇지만 멋은 절대 포기 안 할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