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육아일기
예배를 드리다가 목사님 넥타이색이 마음에 들어 사진을 몰래 찍어보았다. 원래 스크린 뒷벽의 색은 은은한 베이지색이었는데 파란색으로 덧입히니 좀 더 힘 있고 시원한 맛이 난다. 그저 간직할 목적으로 몇 장 찍어보았으나 읽던 책에 ‘이랑’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다시금 사진을 찾아보고 몇 가지 생각을 더하게 되었다. 오와 열을 맞춰 앉아 어느 한 곳을 바라보는 풍경을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둥그렇게 앉거나 듬성듬성 모여 앉는 게 더 좋다) 이번엔 그 모양이 꼭 일궈놓은 밭이랑과도 같아서, 이제라도 그 모양이 눈에 들어와 마음에 공상 하나 띄워본다.
마음에 세상과 교섭해온 그간의 흔적들을 가지고 여럿이 모인 곳이 교회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사람, 넉넉히 벌어 여럿을 먹이고도 남아 저축까지 하는 사람, 쌓아둔 돌멩이가 무너져 마음까지 무너져 내린 사람, 가뭄 끝 단비에 젖어 입술 옆에 꽃을 피운 사람 등등 이 모두가 한 데 모여 비밀들을 풀어헤치는 곳이 여기 예배당이다. 비밀의 크기는 서로 다르나 위에서 보면 하나같이 작은 점들이다. 그 점들이 선을 이루고 그 사이로 물이 흐른다. 목사님의 설교가 물이라고 한다면 그 물이 나아가는 길은 말씀 속 진리일 것이다. 어떤 이는 무릎을 탁 치거나 가슴을 어루만질 것이지만 어떤 이는 되려 진정되지 않은 가슴을 억누르려 애도 쓸 것이다. ‘억울한 일’이 있는 어느 날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왔지만 진리는 내 마음을 위로하기는커녕 눈을 가린 채 저편으로 날아가 버린다면 억울한 일보다 더 억울한 일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어찌 됐든 진리는 물줄기가 되어 우리 사이를 관통한다. 알게 모르게, 예배라는 수고를 통해.
만들어진 이랑에 씨를 뿌리는 것은 이제 비밀을 간직한 이들이다. 예배를 수고라 한 것은 이 때문이다. 설교 전에 옆 사람과 인사를 나누는 절차(?)가 그저 절차로 끝나지 않으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말씀만 저축할 게 아니라 사람(과의 일)을 저축하고 하다못해 내가 앉은 의자와의 기억이라도 저축해야 한다. 누군가 내게 아름다움에 관해 묻는다면 주저 없이 “옆 사람을 끌어안는 일”이라고 말할 것이지만 그것이 말뿐인 아름다움일 공산이 크지만 그래도. 씨를 뿌리는 것은 비밀을 간직한 자들이 옆 사람을 끌어안는 일에서 시작된다고 말하고 싶다. 진리가 가진 어떤 의미에서의 권태로움 보다 나와 너의 의미가 더 간절해질 예배, 비밀에 대한 아량으로 서로 듣기만 해도 되는 관계, 그리고 앞보다는 옆을 위해 하는 기도.
예전에 은수가 예수님 얼굴은 이렇게 생겼어라고 그림을 그려 보여주었다. 누구나 아는 그 얼굴이었지만 나는 장난기가 발동해 이건 너를 약 올리던 어린이집 친구 얼굴 같은데? 하고 빈정거리는 말투로 아이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장난이 섞이긴 했어도 그때 알려줄걸 그랬다. 예수님 얼굴은 누구나의 얼굴이고 혹 가장 가까이 옆집 사는 아저씨 얼굴일지도 몰라하고. 아직 의미를 알아차리기 이르긴 하지만 그렇게라도 이야기를 해줬다면 그 장난 섞인 시간마저도 축적이 되었을 텐데. 사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말을 뱉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저 오늘 아침만 해도 뭐 때문에(지금도 모른다) 잔뜩 마음이 상한 시우를 버스 놓칠까 안아주지도 못하고 보내서 오후 내내 심드렁한 채로 있는데 말이다. 내 가족과의 화목도 버거운데 말이다. 하긴 이것이 나의 가장 큰 비밀이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