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보글보글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OO Jun 04. 2022

나를 깨워준 노래

5월 5주 보글보글 글놀이
"노래로 떠나는 여행"


결혼하고 처음으로 맞이하는 여름휴가를 보내기 위해 태국으로 떠났다. 해외여행에 그다지 관심이 없던 남편이었지만 그가 안 간다고 하면 마누라는 혼자서도 떠날 기색이었다. 나는 나대로 남편을 생각하여 빨빨거리고 돌아다니는 장소는 아예 고려 대상에서 넣지도 않았다. 최대한 쉴 수 있는 휴양지로 정한 곳이 태국 푸켓이었다.


Le Merdien Phuket

우리는 르 메르디앙(Le Merdien)이라는 리조트에서 휴가를 보냈다. 수영을 하고 풀바(Pool bar)에서 맥주와 칵테일을 마시고 호텔에 연결되어 있는 프라이빗 비치를 걸었다. 푸켓의 번화가인 파통(Patong)의 유일한 쇼핑몰인 정실론(Jungceylon)도 다녔다.


남편은 가리는 음식이 없었다. 처음 먹어보는 태국 음식을 아주 맛있게 먹었다. 나는 남편의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타국의 음식을 가리지 않는 모습에서 '우린 참 잘 맞는다.'라고 생각했다. 여행에서 싸울 일도 없었다. 온전히 편안하고 즐거운, 완벽한 휴가였다.


푸켓의 마지막 날은 인근 섬 일일투어를 하기로 했다. 피피섬 인근 바다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출연한 <더 비치>의 촬영 장소다. 영화 <007>의 배경이 된 제임스본드섬도 있다. 그런데 2004년에 쓰나미로 인해 피피섬이 큰 피해를 입었다. 6년이 지난 2010년까지도 복구 중이므로 피피섬을 밟을 수는 없고 그 근처만 갈 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도 어찌 됐든 여기까지 와서 천혜의 자연환경, 에메랄드빛 바다를 놓칠 수는 없었다. 아침에 출발하여 점심을 제공해주고 저녁에 호텔까지 데려다주는 일일투어를 호텔 컨시어지를 통해 예약했다.


날씨가 꾸물꾸물하고 흐렸다. 날이 쨍쨍해야 에메랄드빛 바다와 어우러져 멋있을 텐데 아쉽지만 여행 기간 내내 흐리고 비가 왔다. 알고 보니 푸켓은 여름이 우기이고 겨울이 화창하다고. '피피섬 투어'를 위해 버스를 타고 부둣가로 갔다. 많은 중국인 관광객들이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 식빵 한 봉지씩을 들고 있었다. '점심을 준다는데 배고플까 봐 식빵을 샀나?'


스피드보트는 20~25명의 탑승객과 한 명의 태국인 여자 가이드를 태우고 출발하였다. 나는 어렸을 적에 호수 유원지에서 탔던 모터보트와 대학 시절 춘천 소양강에서 타본 모터보트가 재미있었기 때문에 바다에서 타는 보트에도 두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바다의 파도는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거칠게 출렁이는 파도는 이내 몰아치기 시작한 비바람으로 더욱 높아졌다. 내 뺨을 때리는 물방울이 파도인지 빗방울인지 알 수 없었다. 보트는 위아래로, 옆으로 심하게 움직였는데 자칫 잘못하면 보트가 뒤집어질 것만 같았다. 나이가 20대 초 정도로 보이는 태국인 가이드도 겁에 질려 소리를 지르는 것으로 보아 오늘의 항해가 평소와 다른 게 틀림없었다. '쓰나미가 다시 닥친 건 아닐까? 우리 사고 나서 내일자 신문에 실리는 거 아냐?' 머릿속으로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생존의 공포와 함께 나를 괴롭힌 것은 심한 뱃멀미였다.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여기서 제발 세워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곳은 바다 한복판이었다. 견디고 가야만 했다.


40~50분의 시간이 흐르고 배가 잠시 멈추었다.

"저기가 원숭이 섬이에요."라고 가이드가 말하자 사람들은 모두 가이드가 가리키는 쪽을 봤지만 나는 보지도 않았다. 사람이 죽게 생겼는데 원숭이가 대수람.


배는 야속하게 또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는 그치지 않고 바람도 잦아들지 않는다. 내 멀미도 배가 움직이면서 다시 시작된다. 한참을 가더니 배가 바다 한가운데에 멈추었다. 가이드는 승객들에게 식빵을 두 장씩 나눠 주었다.  

"식빵을 왜 나눠줘? 간식인가?"

나는 눈을 감은 채 식빵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식빵이라도 먹으면 오히려 속이 진정될 것 같았다.

"이 식빵을 뜯어서 물고기 주는 건가 본데?"

남편이 말했다.

뭐라고?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 식빵을 뜯어서 바다에 뿌리고 있었다. 물고기 유인용 식빵을 나 혼자 뜯어먹고 있었다.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남은 식빵 한 장을 뜯어 바다에 던졌다. 아까 중국인 관광객들이 식빵을 한 봉지씩 들고 배에 타더라니 물고기한테 주려고 그런 거였구나. 참으로 뒤늦은 깨달음이다. 사실 난 물고기가 몰려왔는지 제대로 보지 못했다. 내가 죽을 것 같은데 물고기가 오든 말든.

식빵을 먹으러 몰려든 물고기


파김치가 된 나를 이끌고 배는 잘도 다녔다. 당장 호텔로 돌아가고픈 마음인데, 가이드는 무슨 섬 무슨 섬 자꾸 설명을 한다. 예전 투어에서는 피피섬에서 점심을 먹었으나 아직 복구가 다 되지 않았기 때문에 카이섬에서 점심을 먹는다고 한다. 카이섬에 도착하기 전에 바다 한가운데에서 스노클링을 하는 지점에 도착하였다.


스노클링은 출발 전에 내가 가장 기대했던 활동이다. '맑고 깨끗한 물에서 물고기를 보며 스노클링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곳에 도착하니 스노클링을 할 수 없었다. 머리와 옷은 다 젖어 거지꼴이었고 멀미 때문에 어지럽고 울렁거렸다. 도저히 바다에 들어갈 수 없어서 배에 앉아 있었다. 남편과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스노클링을 하러 바다에 들어갔다. 다른 사람들은 멀미를 안 했던 건지, 멀미를 했지만 속이 진정된 건지, 혹은 다시 오지 않을 이 순간을 즐기러 억지로 들어간 건지 모르겠다. 가이드는 우리에게 바다에 들어가면 차라리 덜 추우니 바다에 들어가라고 권했지만 우리는 끝까지 들어가지 않았다. 나에게는 스노클링을 하는 사람들도, 에메랄드빛 바닷물도 보이지 않았다. 멀미와 생존의 공포 때문에 내 눈이 멀어버린 기분이었다. 어쩌면 여기가 이 세상이 아닌 기분마저 들었다.


그때 갑자기 어떤 노래가 들려왔다.  

One, Twenty one guns
Lay down your arms
Give up the fight


이거 뭐지? 많이 듣던 목소린데, 이 노래 누구 노래더라?

노래에서 빛이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귀가 번쩍 뜨이고 다음으로 눈이 뜨였다. 그제야 주변 풍광이 눈에 들어왔다. 사진으로만 보던 에메랄드빛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무섭게 내리던 비는 어느새 작은 방울방울로 내리고, 바다에서 노는 사람들의 미소와 웃음소리도 눈과 귀에 들어왔다. 비바람 속에서 운전하느라 긴장했던 보트 운전사도, 높은 파도에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러대던 가이드도 그 순간만큼은 음악을 들으며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에메랄드빛 바다


"좀 괜찮아?"

그리고 내 곁에서 나를 걱정하는 남편이 있었고.

"어, 이제 좀 괜찮아졌어. 근데 이 노래 누구 노래지? 그린 데이인가?"

"그린 데이인 거 같은데 제목은 모르겠네."


내가 푸켓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아름다운 풍경도, 리조트에서의 여유로운 시간도 아니다. 나는 푸켓 하면 Green Day의 '21 Guns'*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카이섬 인근 바다, 그 암흑 속에서 나를 깨워주는 한 줄기 빛과 같았던 노래.


https://youtu.be/r00ikilDxW4


* 나중에 찾아보니 '21 Guns'는 반전에 대한 내용을 담은 노래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생각보다 너무 길어지고 있다. 러시아가 제발 전쟁을 멈추었으면 한다.)  




일요일이면 로운 작가님께서 보글보글 새로운 주제를 올리실 텐데 토요일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부랴부랴 글을 올립니다. 누가 쓰라고 한 것도 아니고, 제가 참여하겠다고 밝힌 것도 아니라서 쓰다가 중간에 그냥 그만 쓸까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만, 추억을 꾸역꾸역 기워서 올립니다.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