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 사는 친구가 서울에 놀러 오기로 했다. 친구의 아이 둘이 우리 아이 둘과 동갑이라 가끔 만나면 잘 논다. 엄마끼리 친구, 큰아이도 친구, 작은아이도 친구.
일하는 남편들 없이 우리끼리 만나는 거라 편하게 오래 놀 수 있는 호텔 수영장에서 만나기로 했다. 늘 가보고 싶었던 '꿈의 호텔'에 1박을 하려 했더니 가격이 어마어마하다. 아쉬운 대로 당일 11시~7시까지 이용 가능한 호텔 수영장 입장권을 사서 놀고, 잠은 각자 집에서 자기로 했다. (우리는 우리 집에서, 친구네는 친정에서) 아이들은 수심이 얕은 유아풀에서 놀게 하고 나는 친구와 밀린 얘기를 할 셈이었다. 아이들에게 얘기해주니 아이들도 많이 기대하였다.
그러나 친구가 사정이 생겨 서울에 오지 못하게 되었다. 우리 아이들에게 소식을 전하니 아이들이 많이 아쉬워하며 말한다.
"그냥 우리끼리라도 가면 안 돼요?"
6월 얼리버드 티켓으로 산 거라 취소하면 다시 구매하기가 힘들 뿐 아니라 당일치기 여행 간다고 요동친 나와 아이들의 마음이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결국 나와 아이 둘은 표를 취소하지 않고 떠나기로 했다.
학교를 결석하고 놀러 가려면 최소 3일 전에 교외 체험학습 신청서를 제출해야 한다. 목요일 체험학습을 위해 월요일에 신청서를 제출했는데, 날씨가 심상치 않다. 월화수 3일 내내 바람이 심하게 불어 춥고 비가 쏟아진다. 예약 당시만 해도 날이 좋았고, 지난주까지만 해도 이번 주 날씨가 좋을 것으로 예보되어 있었다. 그러나 날씨는 제멋대로 변했다. 비 예보가 없는 날도 예보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비가 쭉쭉 내렸고 한낮에도 추웠다.
"얘들아, 어쩌지? 이렇게 추워서 목요일에 우리 수영할 수 있을까?"
"엄마, 이미 체험 신청서 냈어요. 어쩔 수 없어요."
나는 부랴부랴 아이들 샤워 가운을 주문하였다. 쉴 때 그거라도 입고 있으면 훨씬 따뜻하겠지. 샤워 가운, 구명조끼, 튜브, 물총, 모래놀이 도구 등의 짐이 꽉 찼는데 혹시 몰라 핫팩과 우비까지 욱여넣었다.
남편 없이 가는 여행의 걸림돌은 두 개다. 운전기사와 짐꾼이 없다는 것. 그 말은 즉, 차가 아닌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하고 내가 짐을 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택시를 타고 갔다 오면 체험학습에 물놀이 외에는 쓸 내용이 없을 것 같아서 갈 때는 '버스+지하철+택시'의 조합을 이용하고 올 때는 호텔부터 집까지 택시를 타기로 했다.
심란한 3일을 보내고 드디어 출발 당일이다. 일기예보를 보니 아침에만 비가 내리고 오후엔 갠다고 되어 있다. 오늘은 부디 날씨가 좋기를! 제발!!! 짐을 한쪽 어깨에 메니 어깨가 빠질 것 같다. 짐을 필요한 것만 최소한으로 쌌음에도 불구하고 무겁다. 나 오늘 괜찮을까?
수영장 개장 시간에 맞춰 '오픈런'을 한 결과 우리는 한산한 수영장에서 놀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수영을 못하는 작은아이를 위해 구명조끼를 챙겼는데 없다는 것. 내가 구명조끼를 분명히 넣었는데 작은아이가 집에서 미리 입어본다며 구명조끼를 입고 돌아다녔던 게 생각났다. 내가 "너 그러다 구명조끼 놓고 간다. 다 입었으면 원래 있던 가방에 넣어놔."라고 분명히 말했음에도 작은아이는 제자리에 넣지 않았고, 나도 꽉 찬 가방에 당연히 구명조끼가 들어있으리라 생각했다.
"엄마가 챙겼어야지."
"엄마는 챙겼는데 네가 빼놨잖아. 뺐으면 다시 넣어놨어야지."
"엄마가 있나 봤어야지."
나와 작은아이의 대치 상황이 금방 끝나지 않을 것을 예감한 큰아이는 얕은 유아풀에 들어가서 혼자 논다.
구명조끼를 빌려주는 호텔도 있지만, 이 호텔은 구명조끼 대여 서비스가 없다. 할 수 없이 호텔에서 판매하는 암 링 튜브(팔을 끼워 몸을 띄우는 튜브)를 사기로 했다. 그러나 마침 판매하는 튜브도 아기용만 남아 있고 아이한테 맞는 크기는 재고가 없었다. 돈으로라도 아이의 징징거림을 멈추고 싶었지만 실패다.
"모처럼 놀러 왔는데 이렇게 안 놀고 기분 안 좋게 계속 있을 거야? 엄마가 동그란 튜브는 챙겨 왔으니까 깊은 물에선 이 튜브로 놀면 되잖아."
"그건 자유롭게 못 다닌단 말이야. 구명조끼 빼지 말 걸. 구명조끼만 있었다면."
"여행에선 뭔가 빠져서 불편할 수 있어. 그렇다고 계속 기분 나쁘게 있으면 즐겁게 보낼 수 없는 거야. 없으면 없는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놀아야지. 여기 다시 오기도 힘든데 계속 이러고 있을 거야? 아니면 구명조끼가 없으니 그냥 집에 갔으면 좋겠어?"
작은아이의 기분이 쉽게 풀어질 것 같지 않아서 작은아이가 좋아하는 모래놀이를 권유했다. 모래놀이를 한참 하다가 아이가 말한다.
"나 기분이 많이 나아졌어."
"다행이구나."
"엄만 어때?"
"엄마도 네가 잘 노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풀어지고 있어."
오전에 작은아이와 실랑이를 벌이느라 진이 빠져 얼마 놀지 않았는데도 배가 고팠다. 하긴 서서 지하철을 타고 오는 것만 해도 에너지가 어마어마했을 거다.
점심을 먹으며 쉬는데 춥다! 최근 열흘 중 오늘이 가장 좋은 날씨였지만, 구름이 끼고 바람이 간간이 불어 추웠다. 그나마 수영장이 온수라 물에 들어가 있을 때는 따뜻하지만 밖에 나오면 물이 바람에 마르면서 추웠다. 그래도 오후엔 해가 난다고 하니 기대해보기로 했다.
오후가 되니 해가 나고 사람도 많아졌다. 튜브를 들고 수심이 135m인 깊은 물에 가서 놀았다. 작은아이는 튜브에 한참 매달리느라 팔꿈치가 아프다고 했지만 그래도 즐거워했고, 수영을 배우고 있는 큰아이는 물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 잘 놀았다.
10시 30분에 입장하여 5시까지 유아풀과 성인풀, 그리고 온탕을 왔다갔다 하며 잘 놀았다. 튜브 바람을 빼고 썬베드의 짐을 다 정리한 후 아이들과 나는 각자의 샤워실로 향했다. 수영장에 아이들을 데려오기 전에 가장 걱정했던 게 바로 이것이었다. 나와 아이들의 성별이 달라 샤워실을 따로 써야 한다는 것. 우리 가족은 풀빌라 펜션, 호텔 등 수영 후 방에서 바로 씻을 수 있는 곳으로 여행을 가곤 했다. 바깥 샤워실에서 씻는 것도 낯선데 보호자가 없어서 과연 잘 할 수 있을까 우려되었지만, 매주 수영을 배우러 다니는 큰아이를 믿기로 했다.
"락커 키는 어떻게 해요?"
"응, 손목에 잘 걸어. 잘 씻고 나와. 이따 보자."
천근만근인 몸을 이끌고 천근만근인 짐을 들고 샤워실로 들어갔다. 수영복을 벗는데 손목에 건 락커키가 걸리적거려서 키를 잠시 락커에 올려놨다. 옷을 벗어서 락커에 넣고 문을 자연스레 닫자 "띠리링" 소리가 나며 문이 잠긴다. '앗! 키!'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이미 문이 닫히고 난 뒤였다. 직원을 찾아봐도 직원이 안 보였다. 빨리 씻고 나가서 아이들을 기다리려 했는데, 이를 어쩐다? 아이들도 혹시 나처럼 이런 일을 겪고 있는 건 아닐까? 애들이 다 씻고 먼저 나와서 나를 한참 기다리면 어쩌지? 오만 생각이 다 들어서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알몸인 상태로 직원을 찾으러 밖으로 나갈 수도 없고 답답했다. 나는 수영복을 입고 밖으로 나가려는 사람에게 부탁했다.
"저기... 락커 키를 안에 넣고 문을 닫아서 문이 잠겼는데요. 밖에 나가서 직원에게 말씀 좀 해주세요."
"아, 네. 그럴게요."
그분은 밖에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서 직원에게 말했으니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 나갔다. 빨리 샤워를 해야 하는데 샤워하러 가면 직원을 만나지 못할 테니 계속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나는 한참 후라고 느꼈지만) 직원이 와서 락커 번호와 내 신원을 확인한 후 다시 마스터키를 가지러 갔다. 또 잠시 후 (역시 한참 후라고 느낌) 직원이 다시 와서 락커 문을 열어주었고, 나는 문 열리는 소리에 환호성을 지를 뻔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씻고 나오니 아이들이 먼저 나와 있었다.
"얘들아, 나온 지 오래됐니?"
"아뇨, 저희 방금 나왔어요. 제가 동생 잘 씻을 수 있게 도와줬어요. 탈수기가 있어서 수영복 탈수도 했어요."
"형아가 지도해 줘서 잘 씻었어."
아이들의 말에 눈물이 날 뻔했다.
오구오구, 엄마가 락커 사건으로 혼이 빠진 동안 너희들은 참 잘하고 있었구나.
남편 없이 아이들을 데리고 처음으로 떠난 여행은 롤러코스터를 처음 타기 전처럼 긴장되고 떨렸다. 날씨, 짐, 이동편, 샤워 등 여러 가지 걸리는 게 많았다.
그러나 날씨는 다행히 괜찮았고 나와 아이들도 잘 해냈다. 비록 아이와 티격태격하기도 하고 당황스러운 일도 있었지만 이 정도면 잘 헤쳐 나갔다고 본다. 작은 도전을 해냈을 때의 뿌듯함이 우리를 성장시키는 듯하다.
이번 여행으로 나와 아이들의 여행 능력이 +1 향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