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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O Apr 11. 2023

명품 가방은 괜찮아요

시작은 한 장의 사진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시어머니의 전화. 요는 아버님이 최근에 여윳돈이 좀 생기셔서 어머님의 생신 선물을 사시는 김에 딸과 사위, 아들과 며느리에게도 선물을 주고 싶으시다는 거였다. 어머님과 딸과 며느리에게는 명품 가방을, 사위와 아들에게는 옷 한 벌 사라고 돈을 주시겠다고 하니, 보내준 사진에서 맘에 드는 가방을 골라 보라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나는 아이와 문구점에 있다가 갑자기 전화를 받은지라 많이 당황했다.


안 그래도 미니멀리즘을 표방한다고 옷장을 정리하면서 심란했던 게 엊그제인데, 관심도 없는 명품백을 옷장에 하나 더 추가할 순 없었다. 나는 침착하게 어머님께 대답했다.

“아니요, 괜찮아요. 저 명품 가방 안 들어서요.”


나의 대답이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었는지, 어머님도 당황한 목소리로 얘기하셨다.

“아빠가 앞으로 언제 또 선물을 주겠냐? 처음이자 마지막이나 마찬가진데, 좀 오래 남을 수 있는 물건으로 사면 좋지 않겠어? 결혼식 갈 때나… 출근할 때 들어도 되고.”

“저 출근할 때는 에코백 들고 다니는데요.”

가방을 받으라는 입장과 가방을 받지 않겠다는 입장이 팽팽하게 대립한 후 일단 통화가 종료되었다.



내가 명품을 안 좋아하는 것은 어떤 대단한 신조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안 좋아하는 거다. 사람마다 추구하는 가치와 취향은 다르다. 나는 그 돈이면 다른 데에 쓰는 게 낫다는 입장이고. 예를 들어 여행에 쓰는 돈은 아깝지 않다. 며칠에 걸쳐 없어지는 돈이라 해도 두고두고 이야기할 수 있는 추억이 남으니까. 좋은 사람과 좋은 식당에서 밥 먹는 것도 그런 면에서 많이 아깝지 않다.  


여자 명품 가방 계급도 (출처: 네이버 블로그 Asli)


물론 멋모르는 사회 초년생일 땐 주변에서 루이뷔통(Louis Vuitton)이며 프라다(Prada)며 샤넬(Chanel)이며 명품백을 샀다는 이야기를 듣고 흔들린 적도 있었다. 직장인이라면 하나 장만해야 하나, 싶어 검색도 해봤지만 내 월급으로 감당되지 않는 가방이 대다수였다. 한 10년 전에 직장 후배가 남자친구한테 생일 선물로 보테가베네타(Bottega Veneta) 지갑을 선물 받았다고 자랑했을 때 나는 그 브랜드를 알지 못하여 집에 와서 찾아봤었다. 그 지갑이 몇십만 원 하는 걸 보고 ‘선물의 스케일이 큰 게 요즘 연애인가?’라고 생각했었다.


사실 나 자신도 몰랐다. 내가 명품을 살 형편이 안 돼서 명품을 못 사는 건지, 패션 센스가 떨어져서 안 사는 건지. 몇 년을 갈팡질팡하다가 나는 결론 내렸다. 나 명품 안 좋아하네. 남들이 명품 들어도 하나도 안 부럽네.


내 지인 중에 돈을 모아서 자신을 위한 선물로 명품 가방을 하나씩 사는 이들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선배도, 친구도 그렇다. 나는 그들에게 예쁘다, 잘 샀다 칭찬한다. 반대로 내가 에코백이나 장바구니를 덜렁덜렁 들고 가서 그들을 만나도 그들은 왜 이딴 거 들고 왔냐, 면박 주지 않는다. 서로의 취향을 충분히 존중한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인가!



저녁에 남편에게 “아버님이 명품 가방 사주신다고 어머님한테 연락 왔는데.”라고 말을 꺼냈더니 남편이 크게 웃는다.

“하하하! 아버지, 어머니가 너를 몰라도 너무 모르네.”

“그치? 나를 몰라도 너무 모르시지?”

그래, 남편은 나를 잘 알고 있다. 세상에 나를 잘 알고 있는 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해… 가 아니고!



나는 가방 대신 어떤 걸 받을까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그래, 사위랑 아들도 돈 주신다는데 며느리도 돈 주시는 게 어때서? 선물이란 상대의 마음에 드는 걸로 해야 의미가 있지. 해외 한 달 살기 한 번 더 가게 돈을 보태 달라고 할까? 창문 청소하게 로봇 창문 청소기는 어떨까? 이참에 가스레인지를 인덕션으로 바꿀까?


그때 남편의 전화가 울렸다. 어머님의 전화였다. 방에서 통화하고 나오더니 남편이 하는 말.

“가방이 아니면 아예 안 주신다는데?”

아니, 대체 왜? 기왕 선물 주실 거 상대가 원하는 거 주시지, 왜 가방이 아니면 안 된다는 건데? 가방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게 아버님의 의견인지, 어머님의 의견인지는 몰라도 그렇게 굳어졌다.

가방이 아니면 죽음을, 아니 빈손을.


나는 남편에게 “그럼 그냥 받지 말까 봐.”라고 얘기했다가, 생각을 달리하기로 했다. 아버님은 70대 중반이 되시니 언제든 세상을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시는 것 같다. 이 선물 또한, 먼 훗날 아버님이 안 계실 때 보면서 당신을 기억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선물이길 바라시는 거고.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짠해지면서, 그냥 기쁘게 받으면 될 것을 내가 너무 유난 떨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구찌 가방이 내게로 왔다. 비록 세상 밖에 몇 번 나오지 못하고 옷장 속에 얌전히 앉아있는 신세지만, 구찌 가방 덕에 가정의 평화가 찾아왔다.

옷장에 잠들어 있는 가방


구찌 가방을 선물 받고 한 달이 지난 후 아버님, 어머님을 뵙게 되었다. 나는 일부러 그 가방을 챙겨 메고 갔다. 사주신 가방 잘 메고 있다는 감사 인사도 빼놓지 않았다. 어머님은 잘 어울린다고 칭찬을 하시면서, 본인은 가방 대신 포트메리온 접시 세트를 샀다고 말씀하셨다. 엥? 무조건 가방만 사야 하는 거 아니었나요? 저도 집에 있는 꽃무늬 접시 대신 단색 접시로 바꾸고 싶은데요. 어머님 혼자 접시 사시고 (게다가 또 꽃무늬 접시) 이건 반칙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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