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의 기록법>을 읽고
이 책을 만난 건, 운명 같았다.
도서관에서 신작 코너를 둘러보다가 <에디터의 기록법>이라는 제목의 책을 집어 들었다. 잡지, 뉴스레터, 홈페이지 등 각 분야의 에디터들이 자신의 기록법에 대해 쓴 책이라 재밌을 것 같았다. 책을 대출해 왔으면서도 내심 '뭐, 기록이라는 게 특별할 게 있나? 좋은 글귀가 있으면 메모하고 좋은 생각이 나면 메모하고.'라고 가볍게, 한편으론 무겁게 생각하며 책장을 넘겼다. 왜냐하면 그 쉬운 행동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누구나 하진 않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의 나.
혹자는 책을 그냥 읽으면 안 되고 자기가 글에 활용할 부분을 생각하고 발췌하며 읽으라고도 하고, 혹자는 책이든 영화든 보고 나서 감상을 남겨야 남는다고 한다. 지당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그런 압박감 때문에 책이나 영화 자체가 싫어진 적도 있었다. 아, 영화는 그런 이유에서 안 본 게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 싫어졌지만. 긴 호흡도 버겁고 획일적인 블록버스터 영화도 싫고 작품성 넘치는 독립영화는 마음이 무거워져서 싫고. 잠시 이야기가 옆길로 샜지만, 어쨌든 일과 긴 출퇴근 시간에 찌든 나는 무엇도 기록하고 싶지 않았다.
퇴근하고는 그저 영상을 봤다. 프로야구 시즌엔 야구를 봤고, 야구 비시즌엔 예능이나 유튜브를 봤다. 그리고 드라마도. 주말이나 연휴에 드러누워서 정주행 하는 드라마가 가장 좋았다. 아아, 취미도 없이 백날천날 영상만 보는 나란 인간! 죄책감이 들 때쯤 책도 조금 봤다. 책은 찔끔찔끔 조금씩 봤다. 독서를 놓지만 않으려고 했다.
그러다가 <에디터의 기록법>을 읽게 되었다. 에디터들은 평상시에 기록을 잘해놔야 일할 때 도움이 되기 때문에 각자의 방식으로 기록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매일 일기를 쓰고, 어떤 사람은 좋은 기사를 스크랩하고, 패션 잡지 에디터는 옷 사진을 스크랩하고. 또한 이러한 내용들을 어떤 도구를 사용해서 기록하면 좋은지에 대해서도 서술하였다.
다 좋은 얘기지만 나에게 깊이 와닿지는 않았는데, 나에게 깊은 울림을 준 챕터는 디지털 콘텐츠 서비스 '폴인' 에디터 '도헌정' 님의 글이었다.
기록법? 이 주제로 내가 글을 써도 되는 걸까. 제안을 받고 잠시 고민했다. 나는 성실한 기록자가 아니다. MBTI로 따지면 PPPP인 성향이라 연초에 다이어리를 사도 쓰는 건 길어야 두어 달이었다. 수첩이든 에버노트든 한 가지 방식으로 '꾸준히' 기록하는 업계 동료들이 늘 부러웠다. 그러다 30대 후반이 되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였고(포기했다는 얘기다), 다이어리도 수첩도 더는 구매하지 않았다.
(p. 54)
시작부터 너무 매력적이지 않은가! 나는 MBTI로 따지면 계획형인 J이지만 실상은 P에 가까운 J다. 나 역시 쓰다가 만 다이어리도 많았고, 이제는 사적인 목적으로 다이어리를 두지 않는다. (회사에 업무용 수첩은 있다.) 어느 날은 갑자기 기록하겠다고 설쳐대다가 어느 날부터는 귀찮아서 안 하기 일쑤였다. 시작부터 나를 강렬하게 이끈 이 글은 다음 단락에서 나를 더욱 매료시켰다.
내가 꾸준히 한 게 뭐가 있지? 주어진 일은 열심히 했지만 주체적인 활동은 별로 없었다. 직접 하는 것보다 보는 것을 좋아하는 성향이라, 취미라고는 독서와 영화 감상, 스포츠 보기, 여행이 다였다. (중략)
빈곤한 여가 생활을 뒤적거리다 겨우 하나가 떠올랐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숨 쉬듯 계속한 것(여러분도 떠올려보시라). 왜인지 입 밖으로 꺼내기 창피했지만 그것은 바로 'SNS'였다. (중략)
내게 SNS는 중독성 있는 취미 생활이자 감정과 인풋의 배출구였다. 미래를 위한 목적 있는 영감 수집 혹은 기록이 아니었다. (p. 55)
아니, 이분 나랑 왜 이리 비슷해? 한번 만나보고 싶네. 나 또한 취미랄 게 없었지만, 그나마 싸이월드부터 카카오스토리,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SNS만큼은 열심히 했었다. 무슨 퍼스널브랜딩 뭐 그런 목적이 아니라 정말 순수하게 쓰잘데기 없는 것들을 끄적여 왔던 것이다. ('쓰잘데기 없는 것'에 가족사진은 제외하기로 한다.)
'도헌정' 님은 성실한 기록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일할 때 필요한 기록들을 하긴 한다. 다만 정해진 한 곳에 꾸준히 하지는 않는다고.
강렬한 인사이트를 접하더라도 여유가 있을 때만 SNS 채널 중 어딘가에 기록한다. 아카이빙 하는 채널도 정해져 있지 않다. 즉 나를 위한 기록은 내키는 대로 최대한 편한 방식으로 한다. 그러다 보니 기록하고 싶은 인풋 열 개가 있다면, 그중 한 개가 저장될까 말까 하는 수준이다. 대부분은 보고 읽고 인스타그램 스토리로 공유하고 끝낸다. 그런데 이 공유 과정이 신기하다. 기록하고 싶은 내용은 혼자 보고 지나칠 때보다 사람들에게 공유할 때 머릿속에 각인된다. (p.58)
앞의 내용도 흥미로웠지만, 내가 읽고 쾌재를 불렀던 부분은 다음 챕터인 '기록 습관보다 중요한 건 인풋 습관'이었다. 이 부분을 읽으니 마치 누가 옆에서 "꼭 기록하지 않아도 돼. 맘 편히 드라마든 예능이든 볼 거 봐."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해방감이 들었다.
'도헌정' 에디터는 비즈니스부터 스포츠와 역사물까지 관심사가 많다고 한다. 만화책과 예능, <채널십오야>와 <요정재형> 등 유튜브도 많이 보고, 뮤지컬과 현대무용 공연도 가끔 본다고 한다. 이렇게 장르를 오가며 많이 보다 보면 신선한 기획이 나오고 인물의 인사이트를 알아보는 능력도 생긴다고 한다. 책을 많이 보는 사람이 양서를 잘 고르는 것처럼. (p. 64~65)
그리하여 이 글의 결론은 어떻게 되느냐. 그리고 나를 어떻게 움직이게 했느냐?
내게 기록이란, 앞서 말했듯 노트나 디지털 공간에 기록하는 일만은 아니었다. 머릿속에 인풋을 담는 것도 광의의 기록에 속했다. (중략) 머릿속에 수도 없이 기록된 인풋들이 서로 연결돼 새로운 아이디어가 되어주었다. 이 책을 읽는 여러분도 기록에 대한 강박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예전에 필사를 몇 번 시도했던 적이 있다. (중략) 하지만 꾸준히 하지 못했다. 시간과 에너지가 많이 소요됐기 때문이다. 그때그때 내게 맞는 기록법을 찾는 걸 추천한다. (p. 71)
새로운 인풋을 꾸준히 접하고 그것이 흘러넘칠 때 나만의 아웃풋이 생산된다. 기록도 삶도 마찬가지다. 의무가 아닌 본능이어야 지속할 수 있다.
기록과 아웃풋 없이 인풋만 집어넣던 나는 이 결론에 몹시 고무되었다.
그래, 몇 달간 여가 시간엔 드러누워 드라마만 주구장창 봤는데 자책할 필요 없었어. 나는 아웃풋이 나올 때까지 영감을 쌓아둔 거야. 이제 때가 됐어! 드라마에 대한 감상을 쓰자.
그리하여 나는 움직이게 되었다. 앞선 중국 드라마 리뷰 글은 그렇게 나온 것이다.
<에디터의 기록법> 중 '도헌정' 님의 글이 가장 마음에 와닿았지만, 제일 끝에 있는 '손현' 작가님의 글도 재미났다. 일과 가정과 취미생활 등에 배분할 시간이 절절한 워킹맘 혹은 워킹대디라면 누구나 공감하며 읽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작가님이었는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기록하는 디지털 매체가 여기저기라 정리가 안 된다는 분. 그러나 일단 쌓아두고 보면 필요할 때 다 찾을 수 있다고. (책을 이미 반납해 버려서 어떤 분이 쓰신 건지 기억이 잘... 죄송함미다. 이래서 메모가 중요한가 봐여...)
나 역시 브런치나 SNS부터 'Keep 메모', '구글 Docs', '카톡 나에게 채팅하기' 등 매체에 산발적으로 끄적여놓는 사람이라 공감이 많이 갔다.
마지막으로, 이 또한 어떤 에디터님이 쓴 건지 모르겠는데 (역시 죄송합니다) 감정을 다스리는 좋은 방법이 있어서 소개하고자 한다. 이 분이 마음이 복잡할 때 친구가 추천한 방식이라고 한다.
연도는 없이 날짜별로 매일 파일을 하나씩 만든다. 그리고 해당 날짜에 일기를 쓴다. 첫 해에는 그 일기밖에 없다. 다음 해에는 같은 날짜에 쓴 작년의 일기를 읽고 그 위에 올해의 일기를 쓴다. 다음 해에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써보면 예전에 아무리 힘들고 괴로웠던 일도 지나고 보면 별게 아닌 것처럼 느껴진단다. 그러니 지금의 괴로움도 지나갈 것임을 알 수 있다고.
매우 신선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근시일 안에 내가 시도할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나는 이제 다시 인풋을 채우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