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애도 좋지만, 거 너무한 거 아니오?

<경도를 기다리며>

by JOO

고백한다. 나는 첫사랑 이야기에 취약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첫사랑이었던 남녀가 헤어졌다가 재회하여 다시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뻔한 클리셰 같은 이런 서사를, 나는 일단 '아련 필터'를 끼고 접근한다. 자, 아련해질 준비 완료요!

첫사랑을 그린 드라마나 영화는 일정 점수를 쌓고 시작하므로 다른 류의 이야기에 비해 우위를 점한다. 물론 드라마들이 나에게 간택되고자 경쟁하는 것은 아니지만.


첫사랑을 그린 작품들이 많을 텐데 당장 생각나는 건 최우식 배우와 김다미 배우가 나온 <그 해 우리는>이다. 강아지상의 두 주인공의 합이 좋았고, 영상이나 분위기가 예뻤다. 김성철 배우의 짝사랑 연기도 공감이 많이 갔다.


드라마 <그 해 우리는>

최우식과 박보영이 나온 <멜로무비>는 <그 해 우리는>을 쓴 작가가 쓴 작품이라 분위기가 비슷하다. 이 작품도 꽤 재미있는데, <그 해 우리는>만큼 뜨진 않았던 것 같다.

드라마 <멜로무비>(좌), 영화 <건축학개론>(우)

첫사랑을 다룬 영화 중 제일은 <건축학개론>인 것 같다. 가슴을 뛰게 하는 90년대 후반의 분위기와 정서와 음악.


<먼 훗날 우리(后来的我们)>(좌), <만약에 우리>(은)

중국 영화 <먼 훗날 우리>는 '첫사랑 재회'라는 키워드 때문에 기대를 많이 하고 봤으나 아쉽게도 개인적으로 큰 감흥은 없었다. 최근에 우리나라에서 <만약에 우리>라는 영화로 리메이크되었다. 이건 아직 못 봤는데 언젠가 보려고 한다.




<경도를 기다리며>는 보기 전부터 이미 기대감이 가득한 작품이었다. '첫사랑 이별 후 재회'라는 코드 때문이기도 하지만, 제목부터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가 떠올랐기에.


처음 이 드라마를 보자마자 든 생각은 '여주 예쁘다'였다. 여자 주인공 '서지안' 역을 맡은 원지안 배우는 얼굴이 굉장히 깨끗하고 순수하고 말갛다. 그러나 중 여주는 순수한 외면과는 다르게 욕도 잘하고 입이 거칠다. (내 옆에서 여주의 대사를 얼핏 들은 남편이 쟤 누구냐, 짜증 난다 할 정도로.) 나는 사실 여주 캐릭터가 내 친구랑 닮아서 정감이 갔다. 맑고 깨끗하게 생겨서는 가끔씩 입은 거칠고 반면에 내면은 여렸던 친구.

<경도를 기다리며> 원지안&박서준


남주 '이경도'(박서준 분)는 대학 신입생 때 '서지안'을 만나 한눈에 반하게 된다. 그리고 둘이 사귀다가 '서지안'이 어느 날 갑자기 떠나면서 '경도'는 힘들어한다. 둘은 28살에 재회하여 다시 사귀었으나, '지안'이 또 떠나게 되면서 '경도'는 알코올중독이 될 만큼 삶이 송두리째 흔들린다.


38살에 일 때문에 마주치면서 다시 사귀다가 "또" 헤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는데, 여기선 진짜 화가 나려 했다. 아니, 작가 양반! 순애는 언제나 환영이지만, 첫사랑을 마흔 언저리까지 끌고 가는 건 진짜 너무하잖소!!! 게다가 이 나이쯤 되어 다시 만났으면 굴곡 없이 사랑하게 해 주면 안 되나? 여차저차하여 결국 마지막 회에 둘이 다시 만나게 되는 결말을 맞이하나, 둘이 재회하여 사랑하는 장면은 너무나 짧아서 이게 뭐지 싶은 느낌이 들었다.


'경도'와 '지안' 외에도 대학 연극부 선배 세 명이 나오는데, 참 진국인 사람들이라 보기 좋았다. 연극을 준비하는 과정도 재미있었다. (TMI로 필자는 대학 때 잠깐 연극부였다.) 이 삼인방이 한결같이 '경도'와 '지안'을 챙겨주는 모습이 훈훈했고, 또한 대학 졸업 후에 각자 사는 모습도 공감 갔다. 그런데 막판에 안 좋은 사건이 나와서 좀 황당하고 짜증 났다. '경도'와 '지안'을 재회시키려면 정녕 그 방법밖에 없었나?

<경도를 기다리며> 연극부 오인방


'경도'와 '지안'이 스물여덟에 '지안'의 친구가 하는 드레스 샵에 가서 웨딩드레스를 입고 사진을 찍었다는 설정이 나온다. 결별 후에 '지안'이 서른 살에 다른 남자와 결혼했지만, 웨딩촬영은 '경도'와 먼저 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인데! 이거야말로 억지 설정 아닌가! 내가 보기에 가장 불필요한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극 전체로 보면 70퍼센트는 좋고 30퍼센트는 별로였는데, 30퍼센트의 별로인 부분이 뒤쪽에 몰려 있어 아쉬웠다.


연극부 여자 선배와 남자 선배 커플 얘기를 마지막으로 해보려 한다. 연극부 선배 세 명 중에 둘이 커플이 된다. 여자 선배는 대학 졸업 후에 미술학원을 열고, 남자 선배는 계속 연극을 한다. 남자 선배는 어엿하게 자리를 잡은 연극배우가 아니기에 연극 백업배우를 하는 동시에 음식 배달을 하고, 사실상 생계는 여자 선배가 책임진다. 그러나 여자 선배는 남자 선배에게 바가지도 긁지 않고 넌 할 수 있다며 확실한 믿음을 준다. 나는 이런 게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상대가 어떤 위치에 있어도 한결같이 믿어주는 거. 나는 과연 그러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난 남편에게 바가지 긁고 잔소리하는 쪽일 거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