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로맨틱 어나니머스>
제목이 아주 어려운 <로맨틱 어나니머스>. 입에도 잘 안 붙고 '어나니머스(anonymous)'라는 단어도 무슨 뜻인지 찾아보고야 알 정도로 생소했다. 'anonymous'는 '익명인, 익명으로 된'이라는 뜻이다. 이 드라마는 한일 합작으로 제작된 작품이고, 배경이 일본이다. 일본어 제목은 <匿名の恋人たち>(익명의 연인들)이다. 나는 '익명의 연인들'이라는 제목이 훨씬 직관적이고 좋은 듯하다. 프랑스 영화 <로맨틱스 어나니머스>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라고 한다.
처음부터 특별히 볼 생각은 없었는데, 친구가 이 드라마에 '오구리 슌'과 '아카니시 진'이 나온다는 소식을 전해주면서 관심이 생겼다.
'오구리 슌'과 '아카니시 진'이라니! 아니, 언제 적 '오구리 슌'과 '아카니시 진'이야? 너무 반갑잖아!!!
2000년대 초중반, 나는 한창 일본 드라마에 빠졌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일드 좀 보던 사람들의 정석은 '기무라 타쿠야'부터 입문하여 '기무라 타쿠야'가 나온 드라마를 섭렵한 후 각종 일드로 뻗어나가는 코스였다. 자매품으로 '기무라 타쿠야'의 소속사 쟈니스의 연예인이 나온 예능 파고들기가 있었다.
난 둘 다였다.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나온 웬만큼 유명한 일본 드라마들은 다 본 것 같고, '기무라 타쿠야'의 소속 그룹인 SMAP이 진행하던 예능 '스마스마(SMAPXSMAP)'도 거의 다 봤었다.
'오구리 슌'은 <고쿠센>, <꽃보다 남자> 등에 출연했었다. <고쿠센>에서 반항아 '노란 머리'로 출연했으며, 특히 <꽃보다 남자>에서는 남주 '도묘지 츠카사'와 쌍벽을 이루는 서브남주 '하나자와 루이' 역을 맡아서 인기를 누렸다. 나는 '츠카사'보다는 '루이' 쪽을 더 응원했다.
'아카니시 진'은 쟈니스 소속 아이돌인 '캇툰(KAT-TUN)'의 멤버다. 그 당시 일본 아이돌은 키가 대부분 작은 편이었는데, '아카니시 진'은 키도 나름 크고 (178cm) 얼굴도 잘 생겨서 인기가 많았다. '캇툰(KAT-TUN)'이 한창 인기였던 시절 2010년 홀연히 팀 탈퇴를 선언하고 솔로 활동을 하다가 2012년 결혼 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일본 활동은 거의 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둘 다 나이가 꽤 있어 ('오구리 슌' 82년생, '아카니시 진' 84년생) 로맨스를 찍은 지 오래되었는데, 이 둘이 나온 로맨스라니 반갑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해서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아, 둘의 로맨스는 아니다. '오구리 슌'은 '한효주' 배우와 커플이고, '아카니시 진'은 '나카무라 유리'라는 배우와 커플이다.
<로맨틱 어나니머스>는 8부작으로 매우 짧고, 각 회차당 이야기가 각각의 완결성을 가지고 있는 옴니버스식 구성이다. 일본 드라마는 이런 옴니버스식 구성이 많은 것 같다. 초콜릿 샵이 배경인 만큼 매 회차의 제목이 초콜릿 이름이고 도입부에서 나오는 각 초콜릿의 영상도 예쁘고 기대감을 높여준다.
'한효주' 배우가 타인과 눈을 마주칠 수 없는 '시선공포증'을 앓고 있는 쇼콜라티에 '하나'로 나온다. 한국인인데 일본에 오래 살고 있는 역할이라 일본어로 연기했다. 일본어를 약간 아는 내가 보기엔 한효주의 일본어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일본어를 잘 아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니 한효주의 일본어 발음이 거슬려서 못 보겠다고.
'오구리 슌'은 결벽증이 있는 제과 회사 후계자 '소스케'라는 인물을 연기했다. 처음에는 타인이 지저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나중에 보니 자신이 지저분하다고 생각해서 타인과의 접촉을 피하는 것이었다. 오구리 슌은 연기파 배우답게 연기도 잘하고 캐릭터 소화를 찰떡같이 잘했다.
당연하게도 결핍이 있는 이 둘은 타인과 소통하기 힘들었기에 그동안 연애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둘은 서로에겐 괜찮다. 즉, 소스케는 하나와 닿아도 아무렇지 않고, 하나는 소스케의 눈만큼은 똑바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서로에게 특별한 둘이 어떻게 소통하고 사랑하게 되는지가 주요 관전 포인트다. 불완전한 사람이어도 괜찮다는 교훈을 줘서 위축된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드라마기도 하다.
초콜릿 만드는 장면이 예쁘게 나오고, 일본의 아름다운 장소에서 촬영하여 배경도 아름답다.
드라마의 분량이 짧기 때문에 질질 끌거나 고구마처럼 답답한 장면은 없다. 은근히 웃긴 장면들도 있다. 가볍고 흐뭇하게 보기 좋은 드라마다. 일본 드라마 특유의 교훈적 성격도 담고 있으며, 한국 제작진이 만들어서 한국 드라마적인 전개도 있다.
극의 도입부를 비롯해 중간중간 박혜경 가수의 '고백' 일본어 버전 'Confession'이 여러 번 나오는데, 드라마랑 잘 어울린다. 설레고 풋풋함을 더해준다. 르세라핌 김채원이 불렀다고 한다.
특히 '소스케'와 '하나'가 기차에 같이 탔을 때 이 음악이 나오는데, 설렘이 터지는 장면이다. 음악을 들으며 꾸벅꾸벅 조는 '하나'의 에어팟 한쪽이 떨어지자 '소스케'가 그걸 주워서 하나의 귀에 끼워주려고 하다가 자기의 귀에 낀다. 그때 나오는 노래가 바로 'Confession'이다. 음악이 작게 나오다가 '하나'의 머리가 '소스케'의 어깨에 기대는 순간 음악이 커진다. 캬아! 음악 이어폰으로 나눠 듣기와 여주가 남주 어깨 기대기는 로맨스의 정석이다. (주책은 그만 넣어둬~)
https://youtu.be/CfL2je2UcgA?si=1Y3aqciOKE-PzzBd
아쉬운 점은 '한효주'의 귀여운 척하는 연기, 그리고 '시선공포증'이라는 병을 표현하느라 일부 장면에서 나타난 다소 과장된 연기 등이다.
그리고 '오구리 슌'의 깊은 팔자주름도 아쉬웠다. 팔자주름만 없었어도 멋있었을 텐데. 그러나 남 얘기할 것 없다. 지하철에서 오구리 슌의 팔자주름을 안타깝게 바라보다가 창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니 내 팔자주름 또한 깊구나. 그래, 쟤나 나나 같이 늙어가는 처지인 건 매한가지다. 동병상련을 심하게 느꼈다.
'아카니시 진'은, 나는 사실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한 3부까지 보고서야 '아카니시 진'을 찾아(?) 냈는데, 그의 분위기가 예전과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예쁘장하고 여리여리한 아이돌 느낌이었다면, 이제 상남자가 되어 돌아왔네. 낯설긴 했는데 그래도 지금의 분위기도 그와 잘 어울린다. 그래, 쟤도 나이 들어가는데 언제까지고 아이돌 느낌일 순 없겠지.
2025년에 방영된 이 드라마를 보며 나는 추억여행을 다녀온 느낌이었다. 2000년대 20대였던 그들이 2025년에 나에게 말하는 듯했다. 우린 각자의 필드에서 잘 살아왔다고.
+ 덧붙임.
오구리 슌의 사생활에 대해선 할많하않. 연기도 잘하고 애티튜드도 좋은데 사생활은 대체 왜... 애 셋 아빤데 좀 가정적으로 살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