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2학년이 다 끝나는 날 담임 선생님이 몇 명을 남게 했다.
"내년에 3학년이 되면 반장 선거를 할 거야. 너희들은 반장 후보가 될 수 있으니 이 후보 연설문을 외워. 이건 반장이 되고 난 다음에 말하는 당선 소감문."
학년이 다 끝난 마당에 끝까지 챙겨주신 선생님의 배려 혹은 오지랖 덕분에 난 3학년이 되기 전 봄방학에 연설문과 소감문을 달달 외웠다.
그러나 반장 선거 날, 나는 열심히 외운 연설문과 소감문을 말하지 못했다. 아무도 나를 반장 후보로 추천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같이 연설문을 받았던 친구들은 모두 반장이나 부반장이 되었다. 나는 집에 와서 펑펑 울었다.
"반장은 안 돼도 되는데 후보 연설문은 말하고 싶었어. 내가 얼마나 힘들게 외웠는데!"
펑펑 우는 나에게 엄마는
"짝꿍한테 후보 추천해달라 하지 그랬어?"라고 하셨다.
"어떻게 그래? 엉엉엉!"
가만히 있으면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걸 그땐 몰랐다. 하고 싶다고 손들긴 부끄럽고, 추천해달라고 부탁하기도 용기가 안 났으면서 나서고는 싶던 마음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교내 동요대회가 열렸다. 여태 그런 행사가 없다가 음악 전담 선생님이 우리 학교에 오시면서 새로 생긴 행사였다.
나는 노래하길 좋아하여 하굣길에 노래 부르며 집에 갔다. 내 노랫소리에 엄마는 내가 어디쯤 왔는지 아셨다고 한다. 내가 노래하는 걸 하도 좋아하니 방송국 어린이 합창단에 들어가겠냐고 엄마가 물어보신 적도 있으나 실현되진 못했다. 난 하고 싶었으나 아마 날 정기적으로 방송국까지 데리고 다닐 상황이 안 되었던 모양이었다.
어쨌든 교내 동요대회에 나갈 우리 반 대표를 뽑기로 한 날, 나는 열심히 연습한 노래를 부르기 위해 앞에 나갔다.
그러나!
음악 선생님이 시킨 것은 노래가 아니라 발성 연습이었다.
"아에이오우 해봐."
"아~~~에~~~"
나는 너무 떨려 염소 소리를 냈고 아에이오우를 다 하기도 전에 선생님은 "탈락!"을 외쳤다.
연습한 노래도 못 해보고 탈락이라니..
내 동요 대회!
너댓 명의 지원자 중 반 대표로 뽑힌 아이는 우리 반 1등 똑돌이 경훈(가명)이었다.
나는 아쉬운 대로 경훈이의 피아노 반주를 하기로 했다. 못 나간 동요 대회지만 반주로라도 참가하게 된 것을 기뻐하며 피아노 학원에서 동요 '노을'을 맹연습하였다.
그러나 경훈이는 대회 날이 다가와도 같이 맞춰보자고 좀처럼 얘기하지 않았다.
"경훈아, 반주랑 노래 맞춰봐야 하지 않아?"
"나 대회 안 나가기로 했는데?"
"왜?"
"공부해야 해서."
아니, 뭐라고? 내가 그토록 나가고 싶어 하던 동요 대회를 왜 안 나가? 게다가 안 나가면 안 나간다고 말을 해줘야 할 거 아냐!!!
마음속으로 수많은 말을 외쳤지만,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알았어."
우리 반은 결국 아무도 동요 대회를 나가지 않았다. 만약에 내가 떨지 않고 아에이오우를 해냈다면 나에게도 기회가 주어졌을까?
나서고 싶을 땐 담대한 용기가 필수다. 떨리지만 떨지 않는 척 마음을 컨트롤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고 보니 지원자 모두 아에이오우를 통과하고 노래 한 곡씩은 불렀는데 첫 타자인 나만 아에이오우에서 떨어졌네. 이건 마치 전국노래자랑 첫 소절에서 땡 당한 느낌이구만.)
이미지 출처: 두산 백과사전고등학교 음악 시간 굿거리장단을 배웠다. 입으로 "덩기덕 쿵더러러러 쿵기덕 쿵덕"을 반복하였다. 다음 시간, 선생님이 장구를 들고 왔다. 선생님은 직접 장구 치는 시범을 보여주었다.
"나와서 해보고 싶은 사람!"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다들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나도 평소 같았으면 고개를 숙이고 선생님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겠지만, 그날은 장구를 한번 쳐보고 싶었다. 더러러러~ 우아하게 떨리는 채를 느껴보고 싶었고, 지원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은 강렬한 기분이 들었다.
"저요!"
나는 당당히 손을 들고 나갔다.
양손에 채를 들었다. 장구 폭이 생각보다 넓었다. 왼쪽과 오른쪽 사이가 엄청 길어서 채가 장구에 안 닿는 느낌이었다.
덩!
(한참 후)
기떡 (둔탁하게)
쿵
더더더!
"그게 아니고 손에 힘을 빼고 탄성으로 더러러러 해야지!"
음악 선생님이 외쳤다.
알아요, 안다고요. 근데 내 몸이 내 마음대로 안 되는걸요.
"잠깐만요. 다시 한번만요."
덩 기덕 쿵 더....
이게 왜 이러지.
애들도 웃고 나도 웃고 선생님도 웃었다.
자리로 들어가니 친구들이 "야, 네가 당당히 손들고 나가길래 엄청 잘할 줄 알았어."라고 말한다.
아니, 나도 내가 잘할 줄 알았지. 리듬은 숙지했는데 몸이 말을 안 들을 줄이야.
비록 개망신은 당했을지언정 나는 그래도 지원을 잘했다고 생각했다. 일단 실제로 해봐서 좋았다. 그때가 아니었다면 내가 언제 장구를 쳐보겠는가? 실제로 그날 이후 아직까지 장구를 만져볼 기회가 없었다.
나서고 싶은데 용기가 없다? 그럼 결국 못 나서는 거다. 옆에서 부추겨서 못 이기는 척 자연스레 나설 수 있다면 가장 아름답겠지만, 내가 표현하지 않으면 주변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용기를 내자, 후회가 없도록. (이에 수반되는 개망신도 즐겨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