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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O Oct 16. 2021

괜찮은 사람 미워하기

새로운 부서에 배정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일이다. 전임자는 출산이 가까운 만삭 임산부여서 인수인계해줄 시간이 많지 않아 나는 하루 만에 일을 배워야 했다.

"미안한데 내일부터는 내가 입원을 해서 연락이 되지 않을 거예요."라는 말을 남기고 전임자는 떠나갔다.


지나고 보면 그 일은 하루를 배우나, 한 달을 배우나 어차피 담당이 스스로 깨우치고 헤쳐 나가야 하는 성격의 일이었다. 데일리로 일이 몰아치는 업무는 아니었지만, 모르는 일들은 며칠에 한 번씩 툭툭 튀어 나왔고 나는 대처 방법을 알기 위해 끙끙대곤 했다. 일은 일대로 모르고 전임자에게는 연락도 할 수 없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전입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같은 팀원들에게 물어보기도 쉽지 않았고, 각 팀원들이 담당한 업무가 달라서 내 일에 대해 조언해 줄 만한 사람이 없었다.


전임자는 팀 내에서 평판이 좋았다. 전임자의 전임자가 일을 엉망으로 해놨었기 때문에 내 전임자가 어수선했던 일을 정리하고 절차를 세팅해놨다고 한다. 실제로 전임자는 본인이 할 만큼은 깔끔하게 일을 해놓고 갔다.다만 1년에 한 번씩은 해야 하는 큰 업무들이 있었는데 나의 전입 시기는 이미 6월이었고, 나는 아는 게 없었다. 전임자가 상반기에 큰 일 중 절반이라도 해놓고 갔다면 좀 나았겠지만.


어쨌든 나는 큰일이 터지지 않기만을 바라며 하루하루 고군분투하였다.

전임자가 내게 잘못한 것은 없는데, 그 사람은 괜찮고 일 잘 하는 사람이었는데, 그래서 내가 욕할 거리는 없는데 나는 그냥 이상하게 일을 할 때마다 한 번씩 울화가 치밀었다.

'후임자 생각해서 미리 할 수 있는 건 좀 미리 해놓지. 이렇게까지 배경 지식 없고 맨땅에 헤딩해야 하는 후임자가 올 줄 몰라서 그랬겠지만 본인 선에서 할 수 있는 건 미리 좀 해놔 주지.'

하지만 그 생각의 끝은 항상 괴로움이었다.

'유능하고 괜찮은 사람에 대해 내가 뭐라고 이렇게 나쁜 생각을 갖나. 그 사람도 사정이 있었을 텐데, 상황도 모르고 왜 내가 그 사람을 원망하나.'


이런 괴로움에 대해 한 친구에게 말했더니 친구가 말했다.

"그런 사람 그냥 싫어 해. 네가 그렇게 느꼈다면 안 좋은 사람이네."

"아니, 안 좋은 사람은 아니고. 그냥 내가 힘들어서 그렇지. 나만 잘 하면 되는데. 그 사람은 팀에서 일 잘 하고 정말 괜찮은 사람이었대. 내가 그 사람에 대해 뭘 안다고 그 사람을 판단하겠어?"

"그럼 언제 판단해? 죽은 다음에? 그 사람 죽은 다음에 그 사람 일대기를 다 보고 판단하나? 네가 지금 보고 느끼는 대로 너는 생각하는 거지."


순간, 머리를 띵 얻어맞은 듯했다. 내가 무슨 성인군자도 아니고 맘에 안 드는 사람 있으면 그냥 미워하면 되지, 그걸 안 하겠다고 내자신을 들들 볶는 모습이 미련하기 짝이 없었다.


대학생 때 소개팅을 하고 났을 때 생각도 났다.

주선자가 "어땠어?" 하고 묻는 질문에 대답하는 게 나는 그렇게 괴로웠다.

하루밖에, 아니 몇 시간밖에 못 본 사람을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있을까. 그 사람의 진짜 가치가 이 만남에서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는데 내가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까. 그리고 나 역시도 그 짧은 만남을 가지고 상대한테 평가당할 텐데.

결국 "그 사람 괜찮은 사람인 건 확실한데 나랑 안 맞는 거 같더더라."라고 대답하면서, 고상한 척하는 내 자신의 대답이 너무 불편했었던 기억이 있다.

"맘에 안 들었어."

그 한 마디가 뭐라고.


어쨌든 그 친구의 말을 들은 이후부터 내가 지금 보고 느끼는 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해탈의 경지에 오른 사람도 아니고 그럴 그릇도 안 되는 사람이니, 남들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부르는 사람이라도 내 맘에 안 들면 그냥 맘 편하게 미워하기로. 내 감정이 옳은 건가, 내가 혹시 잘못된 건가 검증하려 하지 말고.

어디 동네방네 소문 낼 것도 아니고 그냥 나 혼자 생각하는 감정이니, 괜찮은 사람도 미워할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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