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깨달은 존
다음날 존 일행은 자전거를 타고 유틸리티 시설로 향했다.
“존, 네가 자전거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다면 우린 새벽 5시에 일어나 출발해야 했을 거야.”
“맞아, 존은 새벽 4시에 일어나야 했을지도 모르지. 영감이라 우리보다 걸음이 느리잖아.”
“하하하 그러게 말이야. 그나저나 존, 그 주황색 옷은 왜 들고 온 거야?”
“이게 우리가 구하려던 청소부 옷이야. 혹시나 해서.”
“경찰서에는 당분간 못 간다고 했잖아. 우리에겐 더 중요한 일이 있다고.”
“알아. 하지만 무겁지도 않은걸.”
“마음대로 하셔.”
일행은 각자의 일터로 향했다. 존은 새벽에 도착한 휴대전화 메시지를 한 번 더 확인했다. 어제와 같은 메시지였다. 존은 메시지의 지시를 따라 어제와 같은 곳에 앉아 같은 일을 시작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빨간 등에는 15분마다 어김없이 불이 들어왔고 그때마다 존은 빨간 버튼을 눌렀다.
11시가 막 지날 즈음 존의 빨간 등에 이상이 발생했다. 빨간 등은 수명을 다했는지 한 번 ‘지직’하더니 더 이상 작동하지 않았다. 존은 당황했다. 상황을 빨리 해결하지 않으면 상수도 공급에 차질이 생길 게 분명했다. 존은 10층 관리자를 찾아가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
“뭐라고? 이거 큰일인걸?”
관리자는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내 한참을 들여다봤다.
“음... 그런 내용은 여기 없는데?”
“그럼 어떡하죠?”
“글쎄, 어쩌지?”
“관리자님. 벌써 시간이 꽤 지났어요. 이게 해결되지 않으면 도시의 수도공급에 문제가 생긴다고요.”
“그래? 그럼 수도공급에 문제없도록 다시 자리로 가서 일하는 게 어때?”
“관리자님, 말씀드렸지만 제 자리에 빨간 등이 고장 나서 언제 버튼을 눌러야 할지 알 수 없어요. 이 상황에서는 제 일을 할 수가 없어요.”
“뭐? 일할 수 없다고? 존, 이건 심각한 근무 위반이야.”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요...”
“그만! 어서 자리로 가서 일이나 하라고. 어? 점심시간이네? 밥 먹으러 가야겠다!”
“지금 이 상황에 밥 먹으러 간다고요?”
“이봐, 여기 스마트폰을 봐! 12시에 밥 먹으라고 되어 있다고. 우린 지시에만 따르면 되는 거야. 너도 어서 밥 먹으러 가. 명령위반은 큰 범죄야!”
존은 하는 수 없이 식당으로 향했다. 그리고 가는 길에 화장실에 물이 잘 나오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수도는 끊기지 않았다. 존은 밥을 먹으면서도 걱정이 태산이었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딱히 없었다.
13시가 지났지만 여전히 빨간 등은 작동하지 않았다. 존은 불안한 마음에 대충 15분에 맞춰 버튼을 눌렀다. 이렇게 불이 안 들어와도 버튼을 눌러도 되는지, 너무 늦게 또는 너무 빨리 눌러서 수도 장치에 무리가 가는 건 아닌지 등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존은 수시로 화장실의 수도를 확인했다. 그의 노력 덕분인지 다행히 수도는 정상이었다.
14시가 되자 정비사들이 10층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들은 정기적인 순찰을 할 뿐 존의 기계를 고칠 마음은 없어 보였다. 존은 10층 관리자가 그들에게 이 상황을 얘기해 주길 기대했지만 관리자는 존의 기계가 고장 난 걸 잊었는지 아니면 그들에게 수리를 요청해야 하는 사실조차 모르는 건지 그들이 떠나려는 걸 그저 지켜보고 있었다. 존은 다른 층으로 가려는 그들을 급히 불러 세웠다.
“여기요, 정비사님들!”
존이 외치자 정비사들이 존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시죠?”
“제 자리에 빨간 등이 안 들어오는데 혹시 고쳐 주실 수 있으십니까?”
“아, 이거요? 간단하죠.”
정비사들이 스위치 패널을 위로 들어 올리자 건전지 박스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들은 새로운 AA사이즈 건전지 두 개를 오래된 건전지와 교체하기 시작했다. 존은 그 모습을 보며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15분마다 누르던 버튼이 그 어떤 다른 장치로도 연결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존은 어릴 적 자동차 정비를 하던 키드슨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존, 보이니? 자동차든 다른 기계든 필요 없는 부품은 하나도 없단다. 모든 건 설계자가 특정 목적을 갖고 설계한 거야. 모든 장치는 서로 연결되어 있고 또 그에 따라서 반드시 어떤 역할을 하고 있지. 이걸 보렴. 핸들도, 버튼들도, 레버들도 결국 그 기능에 맞는 기계장치로 연결되어야 정확히 작동할 수 있는 거야.”
건전지를 교체한 정비사들은 ‘다 됐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다른 층으로 떠났다. 존은 한동안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빨간 등은 이제 정상적으로 작동했지만, 존은 더 이상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그리고 화장실을 확인했다. 여전히 수도는 문제없이 작동했다. 존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변 동료들의 패널을 확인했다. 그들의 레버나 버튼들 역시 다른 장치로 연결돼 있지 않았다. 존은 자신이 그렇게 집착하고 심지어 한때 사명감까지 느꼈던 일이 실제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깨달았다. 유틸리티 시설은 사람들과 무관하게 알아서 잘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제야 존은 점심시간에 모두가 자리를 비워도, 사람들이 모두 퇴근한 후에도 수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이해됐다. 그것들은 그저 사람들에게 삶의 이유를 부여하고 있을 뿐이었다. 무의미한 일을 사람들은 열심히, 그것도 대단한 자부심 속에서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주황색 청소부 옷들을 들고 제임스와 피터를 찾아 나섰다. 로비의 감독관이 떠나는 그에게 ‘바보 녀석! 어서 자리로 돌아가지 못해?’라고 외쳤지만 존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존은 제임스가 일하는 가스공급 시설에 도착했다. 존이 제임스에게 도착했을 때 제임스가 환하게 웃으며 존을 맞이했다.
“존! 왔어?”
“어, 제임스. 얼굴이 밝아 보이네.”
“하하하. 그런가? 사실은 내가 중요한 비밀을 알아버렸거든.”
제임스가 존에게 가까이 와서 속삭였다.
“뭔데?”
존 역시 제임스에게 속삭이며 물었다.
“이건 비밀인데... 내가 10분에 한 번씩 레버를 올렸다가 내려야 하거든.”
“그런데?”
“10분에 한 번이면 30분에 3번의 레버를 올렸다가 내려야 한다는 거지.”
“그렇지.”
“그러면 내가 한 번에 레버를 3번 올렸다 내리면 나머지 30분을 놀 수 있다는 거잖아!”
“맞아. 제임스.”
“놀랍지 않아? 그래서 난 아까 레버를 한 번에 3번 작동시켜 놓고 지금은 여유롭게 쉬는 중이지.”
제임스가 여유 넘치는 우아한 프랑스 귀족 같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으스댔다.
“음... 그러면 차라리 6번을 하고 1시간을 논다던가, 09시부터 12시까지 3시간이니까 18번을 하고 오전 내내 노는 게 낫지 않을까?”
제임스는 존의 얘기를 듣고 마치 신세계를 경험한 듯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말을 이었다.
“존, 내 말이 바로 그거야! 어쩜 나랑 그렇게 똑같은 생각을 할 수 있지? 내 생각을 커닝했나?”
“아니, 그건 아니야. 혹시 오해하게 했다면 미안해.”
“그래? 알았어. 사과를 받아주지. 하지만 난 한 가지를 더 생각해 냈다고.”
“뭔데?”
“이것도 비밀인데.”
제임스가 존에게 더 가까이 오라는 시늉을 했다.
“내 일을 대신해 줄 사람을 찾았지.”
“정말? 누군데?”
“쉿! 목소리 낮춰!”
제임스는 혹시나 비밀이 새어 나갈까 존을 조용히 시켰다. 그리고 옆자리에 앉은 키 크고 희멀건 친구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헤이, 희멀건 제임스.”
“안녕? 제임스?”
“잘 돼가지?”
“어, 물론이지. 무슨 일이야?”
“내가 오늘 아침에 얘기한 거 기억나지?”
“뭐였더라?”
“이런, 바ㅂ, 아니 희멀건 제임스 같으니. 내가 얘기했잖아. 내가 병이 있어서 화장실에 오래 있어야 할 수도 있으니, 그때는 네가 내 일을 봐주기로 했잖아. 기억나지?”
“아, 그거? 물론 기억하지. 대신에 너는 17시부터 내 일을 그만큼 더 해주기로 했잖아. 맞지?”
“정확해. 역시 넌 천재야!”
“하하하 칭찬 고마워.”
희멀건 제임스는 골동품 제임스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 모습을 본 존이 제임스에게 속삭였다.
“제임스. 하지만 17시 이후는 퇴근 후라 아무도 남아 있지 않잖아?”
“쉿! 그게 이 트릭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지.”
“하지만, 그건 속이는 거잖아.”
“존! 속이다니! 이건 양쪽이 만족하는 완전한 거래라고! 희멀건 제임스가 저렇게 행복해하는 거 안 보여? 속이는 거래에 저렇게 행복해 할 수 있겠냐고!”
“하지만...”
존이 계속 이의를 제기하자 제임스가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존, 이 시간에 여기 무슨 일이야? 수도공급은? 아, 너도 나 같은 전략을 썼구나?”
제임스가 음흉한 미소로 존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게 아냐 제임스. 사실은.”
존은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뭐? 그게 정말이야? 그럼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였어?”
“쉿! 제임스 목소리를 낮춰. 우선 수도 쪽은 그랬는데 가스는 어떤지 모르지. 너도 네 자리의 패널을 열어봐.”
“오케이.”
제임스가 자리로 돌아가 패널을 확인했다. 패널은 존의 것과 같이 아무 장치에도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맙소사, 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거야?”
언제나 남을 속이는 입장이었던 제임스는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
“그러게 말이야.”
“젠장! 단단히 속았군! 빨리 피터에게 가서 이 망할 노예 생활을 그만두게 해야겠어!”
존과 제임스는 피터가 있는 4-5번 유틸리티 시설에 도착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피터는 1층에서 감독관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지나는 사람들마다 ‘바보 자식들’이라는 말을 하며, 갖고 있던 경찰봉으로 그들을 위협해 댔다.
“피터,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뭐야, 이 바보 자식들! 어랏? 존? 제임스? 여긴 어쩐 일이야?”
“아니 너야말로 여기서 왜 이러고 있어?”
제임스가 놀란 표정으로 피터에게 물었다.
“아, 이거? 아침에 내가 자전거를 타고 오다 요 앞에서 누구랑 부딪쳐 넘어졌지 뭐야. 그때 스마트폰 하나가 바닥에 나뒹굴더라고. 그래서 집어 들고 봤더니 메시지가 바뀌어 있지 뭐야.”
“그래서 지금 그 메시지 대로 행동하고 있다?”
“응. 당연하지. 우리는 스마트폰의 메시지를 따라야 하잖아. 안 그러면 사회가 붕괴된다고!”
존과 제임스는 여태까지 자초지종을 피터에게 늘어놨다.
“응? 정말이야? 우리가 하는 일이 무의미한 일이라고?”
“그래 피터.”
“하지만 난 이 일이 좋다고. 내 적성에 맞는 것 같아. 게다가 감독관은 언제든지 배고프면 1층에서 밥을 먹을 수 있다고!”
“하지만 넌 어제까지만 해도 일하고 싶지 않다고 했잖아.”
제임스가 피터를 나무라듯 말했다.
“하지만, 이 일은 남들을 마음껏 ‘바보 자식들’이라고 할 수 있다고! 그리고 나는 이 일을 정말 잘 해내고 있다고!”
피터가 스마트폰을 손에 든 채로 목청을 높였다. 피터는 남들 위에서 사람들을 감독하는 업무에 완전히 홀린 것처럼 보였다.
“피터, 하지만 그 일은 네 진짜 업무가 아니잖아.”
존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존, 아냐, 여기 스마트폰을 봐! 분명히 메시지가 쓰여 있다고!”
존과 피터의 대화를 듣고 있던 제임스가 피터의 스마트폰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피터의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피터는 당황해하며 손에 들린 스마트폰과 주머니에서 울리는 스마트폰을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피터, 나 제임스야. 듣고 있지?”
“어, 제임스 듣고 있어.”
제임스가 당황한 피터 바로 옆에서 통화를 이어갔다.
“피터, 어제 기억나지? 우리는 ‘생체인증’을 통해서 스마트폰을 얻었다고. 맞지?”
“어, 그렇지.”
“그리고 지금 너는 ‘생체인증’을 통해 얻은 스마트폰으로 나와 통화 중이야.”
“그렇...지.”
“그럼 네 다른 손에 있는 스마트폰은 누구 것일까?”
“음... 글쎄? 이건 누구 거지?”
“네 것이 아닌 건 확실하지?”
“음... 어쩌면 내 걸 수도 있지 않을까?”
“피터, 이건 정부를 속이는 일이야. 정부에서 ‘생체인증’으로 발급해 준 스마트폰이 아닌 다른 스마트폰을 갖고 있고, 또 그 확인되지 않은 스마트폰의 메시지를 따른다는 것은 중대한 범죄라고! 어쩌면 사형감일 수도 있어!”
“헉! 정말이야?”
“그럼!”
“미안해 제임스. 이건 내 스마트폰이 아니야!”
피터는 제임스의 말에 놀라 손에 들고 있던 다른 휴대전화를 멀리 던졌다.
“제임스. 이제 나 괜찮을까?”
“그럼. 피터. 아마 사형은 면할 수 있을 거야.”
“그럼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음... 글쎄. 존, 무슨 아이디어 있어?”
“이 주황색 청소부 옷을 입고 변장하는 건 어때?”
존이 지니고 있던 주황색 옷을 내밀며 말했다.
“맙소사! 존! 정말 좋은 생각이야! 물론 내 덕분이지만.”
제임스가 존의 손에 있는 옷을 보며 말했다. 주황색 청소부 옷으로 갈아입은 존 일행은 4-5번 유틸리티 시설을 떠났다. 누구도 그들에게 말을 걸지도, 제지하지도 않았다.
“이제 된 거겠지?”
“물론이지. 완벽해 피터. 이제 아무도 네가 중범죄자인 줄 모를 거야.”
“휴우, 다행이야. 하마터면...”
“훗, 잊지 마 피터, 이 제임스가 네 목숨을 구했다는 걸.”
제임스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고마워 제임스. 근데 다음 계획은 뭐야?“
“음... 생각의 시간이군. 이제부터 뭘 한담.”
“어? 저 녀석은?”
피터가 멀리 지나가는 부랑자를 가리켰다. 얼마 전 마흔이 됐다던 그들의 룸메이트 붉은 수염 존이었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헤이! 존!”
일행은 그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존 일행을 눈앞에 두고도 그는 청소부 차림의 피터와 존을 한동안 알아보지 못했다.
“어? 존, 피터잖아? 너희 옷이 그게 뭐야? 더러운 청소부라도 된 거야?”
“뭐? 난 좀 전까지 감독관이었다고!!”
피터의 말에 제임스가 눈을 부라리며 ’사형‘이라는 입모양을 해 보였다. 그걸 본 피터는 깜짝 놀라며,
“아, 아냐, 난 감독관 아니었어! 절대로 감독관이 아니었다고! 제발, 못 들은 걸로 해줘!”
“알았어, 친구! 침착해! 어차피 난 지금 파라다이스로 가는 중이라 다 관심 없다고!”
“파라다이스? 나도 같이 가면 안돼?” 피터가 물었다.
“넌 마흔이 안 됐잖아.”
“그럼 잠깐 구경만이라도... 그리고 훌륭한 음식이 있으면 좀 나눠 줄거지?”
“물론이지, 친구!”
존 일행은 파라다이스로 함께 가기로 했다. 존도, 제임스도 파라다이스가 궁금한 건 마찬가지였다. 부랑자 하나, 청소부 셋. 기묘한 조합의 무리는 도시의 고층빌딩이 밀집된 5 구역으로 향했다. 또 다른 도시의 비밀이 기다리는 빌딩 숲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