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 건너편 한 명의 팔로워

대단한 사람들 사이에서 내 자리를 찾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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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넘기 학원 차에서 내린 진이를 만났다. 아이는 여느 때처럼 주머니에서 명함 크기의 카드 두 장을 꺼냈다. 수업 마칠 때마다 받아오는 소중한 포인트 카드이다. 하루는 아이가 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엄마, 이거 똑같이 쓸 수 있어?"


아이가 내민 카드 한쪽에는 학원 이름이 멋스러운 캘리그라피로 적혀 있었다. 집에 오는 길, 차 안에서 카드를 유심히 들여다보니 엄마가 쓰는 글씨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진이는 시원하게 뻗는 사선체 글씨를 좋아하는데, 그런 느낌이었다. 매번 받아오던 카드를 나도 모으기만 했지 자세히 본 적은 없었다.


"당연하지~ 이건 펜 말고 붓으로 써야겠네. 집에 가서 바로 써줄게!"


집에 들어오자마자 아이는 옷을 갈아입고 나는 식탁에 붓과 먹, 화선지를 펼쳤다. 맞은편에서 아이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니 괜히 긴장됐다. 붓에 먹을 묻히고 획을 살피며 천천히 따라 썼다.


"우와! 완전 똑같다. 어떻게 한 거야?"


아이의 감탄이 터져 나왔다. 공기계 휴대폰을 가져와 사진까지 찍었다.



진이는 내 캘리그라피 연습을 가장 많이 지켜본 VIP 고객이다. 글씨 써 달라는 주문이 제일 많고 평가도 솔직하다. 지난번 엽서에 글씨를 쓰고 수선화를 그렸는데 "색깔이... 지난번 것보다 별로야"라며 팩폭을 날리기도 했다. 엄마가 했다고 무조건 잘했다고 하는 아이는 아니다. 그래서 그날의 찬사는 더 뿌듯했다.


캘리그라피 작업을 하면 종종 인스타그램에 올린다. 그러면 알고리즘은 기다렸다는 듯 세상의 금손들을 내 피드로 불러온다. 새로 뜨는 캘리그라피 계정마다 입이 떡 벌어진다. 내가 쓴 걸 올려도 되나 하는 망설임이 매번 스쳐 간다. 그래도 그냥 올린다. 완벽해서가 아니라 그저 계속 쓰고 싶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 아이와 책 먹는 여우 시리즈를 함께 읽었다. 《책 먹는 여우》에서 여우는 도서관 책을 몰래 가져다가 소금과 후추를 뿌려 먹다 들킨다. 도서관에서 책을 구할 수 없게 되자 서점에서 책을 훔치다 감옥에 간다. 책을 먹지 못하게 되니 직접 글을 쓰기 시작했고, 결국 유명한 작가가 된다.


이후 《책 먹는 여우와 이야기 도둑》에서 작가 여우는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모은다. 지팡이 스무 개, 고장 난 우산, 병뚜껑, 부러진 볼펜.. 그런데 하룻밤 사이, 그걸 모두 도둑맞는다.


범인은 도서관 천장에 숨어 살던 생쥐였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우처럼 유명한 작가가 되고 싶어 이야기를 훔친 것이었다. 사연을 알게 된 여우는 생쥐에게 글쓰기를 가르쳐 준다. 생쥐는 낮에는 도서관 일을 돕고, 밤에는 글쓰기를 배운다.


글쓰기는 쉽지 않았다. 아무리 써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대신 도서관 일 돕는 시간은 즐겁고 보람 있었다. 결국 생쥐는 깨닫는다. 꼭 작가가 될 필요는 없다는 것과 이야기를 사랑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라는 사실을.


책을 읽으며 잘하고 싶은 마음과 나에게 어울리는 자리는 다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스타그램 속에는 대단한 글씨가 넘쳐난다. 비교하기 시작하면 내 글씨는 한없이 초라해진다. 하지만 내 곁에는 붓으로 쓴 글씨를 보고 "엄마 글씨 같다"라며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다.


대단한 캘리그라퍼가 되려는 건 아니다. 그저 좋아서, 계속 쓰고 싶어서 붓을 든다. 그리고 내가 쓴 글씨를 기쁘게 바라봐 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생쥐가 자신만의 자리를 찾았듯 나도 남의 자리에서 서성이지 않으려 한다. 인스타그램의 수많은 '좋아요' 보다 식탁 건너편 한 명의 팔로워가 내게 더 소중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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