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성공보다 지금의 설렘에 집중하기
크리스마스가 며칠 지난 어느 날이었다. 축구 학원에 다녀온 둘째가 나를 보자마자 말했다.
“엄마, 나 에반프라임 사고 싶어!”
에반프라임은 헬로카봇 중 하나였다. 학원에서 친구들과 선물 이야기를 했던 모양이다.
집엔 이미 로봇들이 1500 책장 한 줄을 꽉 채우고 있다. 미처 들어가지 못한 로봇 몇 개는 자동차로 변신해 거실 매트 위에 주차 중이다. 거기다가 산타할아버지와 친할아버지, 외할아버지에게서 크리스마스 선물로 변신 로봇을 세 박스나 받았는데 로봇을 또 사달라니.
우선 검색부터 해봤다. 판매하는 곳이 많지 않았고, 작고 단출한 구성에 비해 가격이 꽤 나갔다. 선물 받은 지 며칠 지나지 않았으니 이건 사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아이는 에반프라임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당근 마켓에 검색해 보니 중고 제품 하나가 만 원에 올라와 있었다. 아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로봇함으로 갔다. 한참을 고민하며 커다란 로봇들을 몇 개 꺼내 식탁 위로 옮겼다. 전년에 생일 선물로 받은 3단 합체, 4단 합체 로봇들이었다. 각각 10만 원 가까이 되는 아이들이다.
“이거 팔고 에반프라임 살래.”
정말 이걸 다 팔고 에반프라임을 사겠냐고 몇 번을 물어봤다. 아이는 조금의 미련도 없어 보였다. 눈빛은 오히려 더욱 간절해졌다. 집 안 가득한 로봇들을 정리할 필요도 있었기에 아이 말대로 하기로 했다. 로봇 두 세트를 저렴하게 팔고, 중고 에반프라임을 구입했다.
내 두 손으로도 들기 벅찼던 장난감들이 아이의 손바닥만 한 로봇 두 개로 바뀌었다. 내 거는 아니지만 아까웠다. 이전 로봇들이 훨씬 비싸고 크고 멋있었는데.
하지만 에반프라임을 손에 쥔 아이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뻐했다. 하루 종일 손에서 놓지 않고, 외출할 때도 꼭 들고나갔다.
정여울 작가는 《마흔에 관하여》에서 마흔을 '진정한 나로 살아갈 수 있는 시기'라 말한다.
마흔에 다다른 나는 여전히 과거의 나와 씨름하고 있었다.
경력 단절을 겪으며 한때 잘 나가던 시절의 내가 자꾸 떠올랐다.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서 얻었던 성과들이 아깝게 느껴졌다. 당당하게 나를 소개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자신감마저 흐릿해진 것 같았다.
책을 덮으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얼마나 과거의 성과에 머물러 있었던 걸까.
경력이 단절되었다고 해서 내 가치마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새롭게 배워가고 변화할 수 있는 시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의 나를 놓아주기로 했다. 그 시절은 헛되지 않았다. 지금의 나를 지탱해 주는 든든한 바탕이 되어주었다. 이제는 나를 다시 채워갈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 나다운 삶을 그려가고 싶다.
아이는 이미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더 크고 비싸고 화려했던 과거의 로봇이 아니라 지금 마음이 향하는 작은 로봇 하나가 더 중요했다.
과거의 성공과 추억을 떠올리며 망설이던 나와는 달랐다. 지금의 간절함을 향해 손 내밀 줄 아는 아이의 선택이 어쩌면 더 현명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래된 성공을 정리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선택하는 용기. 그 작은 선택이 삶의 방향을 바꿀지도 모른다.
이제는 내 안의 헬로카봇을 정리하려 한다. 화려하지 않아도 좋다. 지금 내가 원하는 것, 지금의 설렘으로 내 삶을 다시 채워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