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 2학년 아이들의 고백
첫째가 초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같은 아파트 아래층에 사는 친구 Y와 함께 학교에 가던 길이었다. Y가 어떤 남자아이에게 고백했다고 말하던 찰나, 뒤에서 다른 여자아이가 반갑게 달려오며 외쳤다.
"야! 너 솔로 탈출했다며?"
셋은 "진짜?". "대박!", "뭐야?" 하며 잔뜩 들떠 수다를 이어갔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하굣길에는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엄마 J라는 친구가 1학년 때부터 짝사랑하던 남자애가 있거든. 고백했는데 실패했대. 그 남자애가 '한 씨 여자가 싫다'라고 거절했대. (J는 한 씨) 그래서 J가 자기 성을 이 씨로 바꾸고 싶다 그랬어. 내가 그건 좀 안 어울린다고 했지."
초등학교 2학년이 고백에 성씨까지 논하다니.
고백이 뭔지, 고백에 성공하면 어떤 일이 생기는 건지 알고 있는 걸까. 그게 더 궁금했다. 고백, 솔로 탈출, 거절, 슬픔 등등 그런 말들이 아이들 입에서 너무 자연스럽게 오가는 걸 보니 새삼 놀라웠다.
내 학창 시절에는 '좋아하는 사람 이름을 노트에 가득 쓰면 이루어진다'거나 '사쿠라 펜 안에 좋아하는 사람 이름 쓴 종이 넣고 잉크를 다 쓰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라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사쿠라 펜만 사용하는 친구들, 몰래 펜을 훔쳐 누구 이름이 쓰여있나 보는 짓궂은 친구도 있었다.
나의 첫 고백은 열세 살 때였다. 고백이 뭔지 이후엔 어떻게 되는 건지 잘 모른 채 친구와 남자아이네 집 앞에서 선물만 전해주고 도망갔던 기억. 그러고는 끝이었다.
첫째는 밸런타인데이 무렵부터 고백에 성공하고 싶다고 종종 말했다. 심지어 자기 전 기도 시간에도 "고백에 성공하게 해 주세요" 같은 내용이 들어가곤 했다. 누구한테 고백하고 싶은 거냐 물었더니 어떤 오빠와 친구 이름이 나왔다. 그런데 고백하고 싶은데 거절당할까 봐 못 하겠다고 한다. 그럴 땐 장난 반 진심 반으로 고백은 스무 살 넘어서하고 웬만하면 고백받는 사람이 되라고 이야기해 준다.
물론 내 마음대로 될 리 없다. 아직은 아기 같지만 언젠가는 이성에 눈뜨고 관계와 사랑, 이별이라는 것을 겪을 날이 오겠지. 그때가 오기 전에 아이가 자기 마음을 잘 지킬 줄 알고 누군가의 마음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요즘 나는 조금 더 진심을 담아 아이와 이야기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무거운 이야기보다는 하굣길에 들은 이야기, 친구와 나눈 말들, 웃긴 얘기 속에 아이 마음이 살짝 드러날 때가 많다. 아이가 눈치 보며 말 꺼내려는 기색이 보이면 괜히 말을 먼저 꺼내지 않는다. 한 번쯤 웃고 지나칠 수 있는 얘기에도 "진짜?", "그래서 넌 어떻게 생각했어?" 하고 되묻다 보면 아이가 조금 더 말을 풀어놓는다.
큰 소리로 훈육하기보다는 조용히 들어주는 쪽이 훨씬 힘든 일이라는 걸 요즘 들어 자주 느낀다. 마음을 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니까 나는 그 시간을 조금 더 기다려보려 한다.
내 고백 이야기를 우리 엄마는 끝내 몰랐던 것처럼 어쩌면 아이의 진짜 고백 이야기도 언젠가는 나 몰래 지나가 버릴지 모르겠지만.
최근엔 태권도 학원에서 첫째를 좋아하는 동생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심지어 연하. 둘째 친구란다. 좋아한다고 자꾸 고백하고, 학원 차 안에서는 손으로 하트를 날린다고. 옆에 있던 친구가 왜 저 누나 좋아하냐고 물었더니 "예뻐서"라고 했단다.
그 얘기를 전하며 첫째는 말했다.
"귀찮아. 고백 좀 그만했으면 좋겠어."
그래. 솔로 탈출은 스무 살 넘어서해도 안 늦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