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숙함도, 깨달음도 언젠가 찾아온다는 것을 믿기로
둘째 아이가 네 살 무렵, 자동차에 푹 빠졌던 시기가 있었다. 뽀로로나 핑크퐁이 그려진 장난감 자동차들. 버튼을 누르면 차에 어울리는 소리와 노래가 나고 앞으로 밀면 저 멀리까지 쭉 달려 나갔다. 구급차, 소방차, 경찰차는 기본이고 쓰레기차, 레미콘, 불도저, 지게차까지 없는 자동차가 없을 정도였다.
아이 생일을 맞아 할머니와 장난감 가게에 함께 갔다. 자기 몸집만 한 무선 조종 자동차를 골랐다. 집에 와서 조종기 잡고 버튼을 눌러봤지만 방향 조절하기엔 아직 너무 어렸다. 자동차는 엉뚱한 곳으로 튀어 나가 벽에 부딪히기 일쑤. 뭐라도 부술까 봐 걱정하는 부모의 마음을 알았던 건지 아이는 금세 흥미를 잃었다. 우리는 조종기를 재빨리 창고 보관함 속 깊숙이 넣어두었다.
큼직한 자동차는 방 한구석에 놓인 채 먼지만 쌓여 갔다. 가끔 동물이나 인형들의 차로 사용되긴 했지만 본연의 기능은 잊힌 듯했다. 이사 준비하며 버릴까 말까 한참 고민했다. 자리만 차지하는 데다 혹여 조종하고 싶어 할까 봐(?) 걱정도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조금만 더 크면 잘 가지고 놀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결국 데려와 장롱 안에 넣어 두었다.
자동차를 산 지 4년이 흘렀다. 지금은 좀 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종기에 건전지를 넣고 아이와 함께 아파트 앞 공터로 나갔다. 몇 번 해보더니 금세 감을 잡았다. 속도 조절하며 장애물도 요리조리 피해 갔다. 장난감도 다 때가 있었다. 네 살엔 어렵던 것이 여덟 살이 되니 능숙해졌다.
생각해 보니 나도 그런 경험이 많았다. 예전엔 도무지 이해되지 않던 책이 어느 날 술술 읽히고, 어렵기만 했던 일이 어느새 익숙해졌던 경험들. 처음 캘리그라피를 시작했을 때는 펜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도 몰랐는데 어느샌가 획의 굵기를 조절하는 감각이 생겨 있었다. 그땐 도저히 안 되던 것들이 시간이 흐르자 자연스럽게 되었다.
아이를 키우면서도 자주 느낀다. 남들 다 하는 걸 우리 아이만 못하는 것 같아 조바심 났던 순간들. 결국엔 별일 아니라는 듯 해내는 날이 찾아왔다. 한글 떼기, 줄넘기, 더하기, 자전거 타기... 그 모든 것들이 그랬다.
친정에는 두 돌 된 조카가 있다. 덕분에 집 안은 아기 장난감으로 가득하다. 버튼 누르면 불이 반짝이거나 소리가 나는 단순한 장난감들이 대부분이지만, 영어 단어 듣고 맞는 버튼을 누르거나 심지어 코딩이 접목된 장난감도 보였다. 부모의 바람이 담긴 결과겠으나 아직 어린 조카는 복잡한 기능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손에 잡히는 대로 만지고 눌러보다 우연히 반응이 나오면 즐거워하며 반복할 뿐이다. 기능을 활용하는 게 아니라 반응을 탐색하는 놀이. 그 자체로 충분한 나이였다.
초등학생이 된 우리 아이들은 다르다. 어릴 적 가지고 놀았던 장난감들을 다시 만난 아이들은 훨씬 더 능숙하게 놀았다. 숨겨진 기능을 찾아내고, 이것저것 조합해 새로운 놀이를 만들어 냈다. 코딩 장난감은 둘째도 몇 번의 시도 끝에 성공했다. 같은 장난감이라도 이해하는 수준이 다르니 가지고 노는 방식도 달라지는 법이다.
요즘 나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계발을 통해 자신만의 강점을 찾고 퍼스널 브랜딩을 만들어 나가고 있지만 나는 아직 머뭇거리고 있다. 나만의 강점은 뭘까? 가치관은? 내세울 만한 전문성이 있나?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 앞에서 가끔은 초라해지기도 한다.
어쩌면 이 모든 과정도 장난감을 익히는 것과 비슷한 게 아닐까. 조카가 장난감을 만지며 기능을 익히듯 나도 내 안의 가능성을 하나씩 눌러보는 중인지도 모른다. 아직은 낯설고 어색하지만 언젠가는 좀 더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될 거다.
억지로 답을 끌어내려고 조급해하지 않아도 괜찮다. 네 살 때는 할 수 없던 걸 여덟 살에 해내는 것처럼 지금은 잘 모르는 나 자신을 언젠가는 좀 더 분명히 이해하게 될 것이다. 장난감도 나도 결국엔 다 때가 있다. 지금은 단지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