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워하는 마음에도 이유가 있어요
둘째가 유치원에 다니던 시절, 아침마다 킥보드 타고 등원했다. 아이는 신나게 달렸고 나는 운동 겸 뛰었다. 쉬지 않고 달릴 준비가 되어 있지만 발길을 멈추게 되는 순간이 있었다.
바로 ‘개’다.
둘째는 작은 강아지조차 무서워한다. 50미터 앞에서 강아지가 다가오는 걸 보기만 해도 얼음이 된다. 우리가 앞질러 가면 자꾸 뒤 돌아보며 “쫓아오면 어떡해?”하고 울상이다. 이미 멀어져 보이지 않는데도 말이다.
아이를 배려해 줄을 짧게 잡거나, 미안하다고 재빨리 지나가 주는 보호자들도 있다. 그런 분들은 참 고맙다. 반면 어떤 사람은 뭘 그렇게 무서워하냐며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고 가기도 한다. 그럴 땐 나도 괜히 민망해진다.
사실 아이는 원래 이렇지 않았다. 강아지 보면 귀엽다고 가까이 다가가곤 했었다. 둘째가 여섯 살이던 여름날, 주민 한 분이 아파트 벤치에 갈색 푸들을 데리고 앉아 통화하고 있었다. 그 앞을 지나가는데 갑자기 푸들이 짖기 시작했다. 큰 소리에 깜짝 놀란 둘째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날 이후로 강아지를 보기만 해도 귀 막고 멀리 돌아가려 한다. 처음엔 이해되지 않았다. 안고 있는 강아지도, 줄이 짧은 강아지도 무서워하니 때로는 한숨이 나오기도 했다.
나는 스스로 운전을 잘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남편은 내 운전이 좀 험하다고 자주 말했지만, 사고 한번 없이 10년 넘게 달려온 자부심이 있었다. 어떤 길도 겁나지 않았다.
그런데 내 인생에서 가장 강렬한 사건이 일어났다.
교회 모임이 있던 날이었다. 식당 근처 골목길에 내가 먼저 진입했는데 왼쪽에서 트럭이 쑥 튀어나왔다. 트럭이 다시 뒤로 들어가길 기다렸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후에 들어보니 미끄러워 후진이 안 됐단다.) 오른쪽에는 차가 주차되어 있어 공간이 분명히 좁아 보였다. 앞에서 음식점 사장님은 연신 오라는 손짓을 해댔다. ‘앞에서 봐주는 사람이 있는데 해보지 뭐’ 하는 마음으로 살살 움직였고 무사히 빠져나왔다고 생각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려는데 사장님이 다가와 말했다.
“제가 이렇게 오라고 손짓했는데 그렇게 오면 어떡해요. 벤틀리 긁으셨어요."
헐.... 앞에서 보고 있었으면 닿을 찰나에 말을 해줬어야지. 아니 근데 그 차가 벤틀리였다고?!!
알았더라면 자존심 버리고 후진했을 거다.
알았더라면 한번 해보자며 액셀 밟지 않았을 거다.
그렇게 나는 3억짜리 벤틀리를 긁.었.다.
사장님(놈이라고 쓰고 싶지만)은 자기가 오라 해놓고 왜 왔냐는 듯한 태도였고, 나는 교회 사람들과 함께여서 얼굴 붉히지도 못하고 속만 끓였다. 어쨌거나 사고는 명백히 내 잘못이었다. 남편이 나서서 차주에게 연락하고 사과했다. 전체를 도색하겠다 해도 할 말 없는 상황이었다.
벤틀리 사건 이후 내 운전은 달라졌다. 고급 차와는 최대한 거리를 둔다. 좁은 길이나 코너에서는 절대 무리하지 않고 천천히 운전한다. 주차가 조금이라도 까다로울 것 같으면 과감히 포기하고 멀리 주차한다. 무리한 우회전을 시도하지 않고 신호가 바뀌길 묵묵히 기다린다.
그제야 아이가 강아지 무서워하는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아이에게 강아지는 ‘벤틀리’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무서운 기억이 한 번 박히면 아무리 안전해도 그 공포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차주에게서 며칠간 연락이 없었다. 바람이 불면 ‘운행을 안 하시나 보다’, 비가 오면 ‘오늘은 공업사 안 가셨나 보다’ 하며 떨리는 마음으로 연락을 기다렸다. 일주일 뒤,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출장 다녀오느라 늦었다며, 공업사에 곧 들를 예정인데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단다. 매너와 인성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며칠 후, 차주 선생님께서는 벤틀리에 맡기면 몇백은 나올 건데 그렇게 하기엔 본인도 싫다며 일반 공업사로 왔고, 30만 원을 공업사 계좌로 보내면 될 것 같다고 연락하셨다. (선생님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ㅠㅠ)
나는 강아지를 먼저 발견하면 아이에게 미리 알려주고 대피(?)시킨다. 강아지를 안아달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줄 짧게 잡아주셨어. 괜찮아, 여기로 안 와.”하며 아이에게 큰소리로 말해준다. 그 말이 강아지 보호자에게도 닿기를 바라며.
누군가에겐 별것 아닌 존재가 우리에겐 3억짜리 벤틀리만큼이나 조심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