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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산 May 23. 2024

이런 친구 또 있을까, 관포지교(管鮑之交)

- 사마천, <사기열전(史記列傳)> 관안열전(管晏列傳)에서 


관포지교


얘들아, 너희들에게 다섯 번째로 들려주고 싶은 고사성어는 관포지교라는 말이야. 관(管)은 관중(管仲)이라는 사람을 말하고, 포(鮑)는 포숙(鮑叔)이라는 사람을 말해. 관포지교는 관중과 포숙의 사귐이라는 뜻이지. 이들의 우정이 남다른 면이 있어 사람들이 우정의 대명사로 관포지교를 말하곤 하지. 앞에서 배운 수어지교가 군주와 신하와의 관계를 말하는 것인 반면, 관포지교는 순수한 우정을 말하는 것이지. 그런데 이들의 이야기가 사기열전에는 상당히 간단히 전해지기 때문에 사람들이 대개 표면적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지. 그러나 관중이라는 사람의 비중은 단순히 우정을 이야기할 때 언급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야. 중국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대단한 인물이지. 그가 큰일을 해낼 수 있었던 배경에 포숙과 나눈 우정이 있는 것이니, 그들 우정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중국 춘추시대 역사를 좀 자세히 살펴보면서 생각해야 해. 그래야 인간에 대한 이해로서 관포지교라는 말을 깊이 이해할 수 있어. 관포지교라는 말에 숨겨져 있는 의미는 ‘공정한 사귐'이라는 것이야. 진정한 우정은 서로 잘해주고 믿어주는 것을 넘어, 사람의 능력과 가능성을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인정해주는 데서 비롯한다는 것이지. 너희들도 공정하게 벗을 사귀고 있니? 공정하게 벗을 사귄다는 것 자체가 궁금할 수도 있겠구나. 이제 그 이야기를 들려줄게. 


가난한 관중과 돕는 포숙


관중과 포숙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들은 귀족이 아니었어. 중앙 권력으로 진출하기엔 신분이 너무 초라했지. 만약 제후국들이 서로 부국강병을 위해 경쟁하던 춘추시대가 개막되지 않았다면 중요 관직에 오르는 꿈도 꾸지 못했을 거야. 이런 출신 성분 때문인지 관중은 젊은 시절 많은 좌절을 겪었던 것으로 보여. 스스로 그렇게 얘기하지. 그 좌절을 겪는 동안 포숙은 늘 관중을 돕는 사람으로 곁에 있었어. 관중의 말을 들어보자. 

“내가 처음 가난하던 시절, 포숙과 더불어 장사를 했다. 재물의 이익을 나눌 때마다 내가 많이 가져갔으나 포숙은 나를 욕심쟁이로 여기지 않았다. 내가 포숙을 대신하여 일을 꾸미다 곤궁하게 되었을 때도, 포숙은 나를 어리석다 하지 않았다. 유리하고 불리할 때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일찍이 세 번 벼슬에 나섰다가 세 번 다 군주에게 쫓겨났지만, 포숙은 나를 모자란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다. 내가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예전에 세 번 전쟁에 나가 세 번 도망쳤지만, 포숙은 나를 겁쟁이로 여기지 않았다. 내게 늙은 어머니가 계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좋은 신분을 가지지 못한 관중, 가난한 관중은 살아가려고 장사도 하고 벼슬을 얻으려고 노력도 많이 한 것 같아. 그러나 쉽게 성공하지는 못했지. 그때마다 포숙이 그의 곁에서 그를 기다려주고 인정해주고 도와주었다는 거야. 힘들 때 친구가 진짜 친구라고 하지? 관중에게 포숙은 바로 그런 벗이었어. 그런 관중이 어떻게 역사에 남는 사람이 되었을까? 이제 그 이야기를 해볼게. 

당시 중국은 왕이 다스리는 주나라가 중심에 있고, 제후로서 땅을 나누어 받아 다스리는 제후국들이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형태였어. 주나라가 형님 나라였고, 주변 나라들은 동생 나라였지. 그 동생 나라는 주나라 왕실인 ‘희’ 씨 성을 가진 제후의 나라들도 있었지만, 성이 다른 나라들도 있었어. 대개 주나라가 세워질 때 공을 세워 그 대가로 나라를 받은 경우였지. 주나라를 세울 때 가장 큰 공을 세운 강태공에게 주어진 나라는 제나라였지. 지금의 산동성 일대가 제나라 땅이었고, 임치라는 곳을 수도로 했어. 강태공의 고향은 원래 주나라가 있던 서안 부근이었지만, 아주 먼 산동 쪽으로 분봉 받아 떠나게 되었지. 나라를 세운 공신이 가까이 있으면 그 공신의 힘이 커져서 왕가를 위협할까봐 멀리 보낸 것이야. 

 빈 낚싯대를 드리우고 때를 기다렸다던 바로 그 강태공이야. 그래서 지금도 낚시꾼들을 강태공이라고 칭하곤 하지 


그렇게 먼 산동에 자리 잡은 제나라는 강태공 이후에는 별로 강한 나라가 되지 못했어. 자주 형님 나라인 주나라에게 굴욕을 당하는 나라에 불과했지. 이런 제나라를 처음 나라답게 재정비한 사람은 희공이라는 제후였어. 그렇지만 희공의 큰 아들 양공은 아버지의 과업을 이을 인물이 되지 못했어. 상상하기 힘든 패륜아였고 무능하기까지 했지. 주 시대의 종법 상 큰 아들이 왕위를 이었지만, 반드시 문제가 일어날 것으로 생각한 희공은 둘째 아들 규는 관중에게 맡기고, 셋째 아들 소백은 포숙에게 맡겨 후일을 기약했어. 성숙기 제나라의 위기 상황이 관중이 역사에 등장하는 배경이 되는 것이지. 

양공은 제 누이와 정을 통한 임금으로 기록되어 있어. 입에 담기도 싫은 내용이라 간단히 언급할게.


희공이 관중과 포숙에게 아들을 맡김으로써 관중과 포숙은 스스로 큰 인물이 될 가능성이 생겼어. 자기가 맡은 공자(公子)들이 제후가 되는 날이면, 크게 벼슬을 할 수 있게 될 테니 말이야. 하지만 친구 사이였던 관중과 포숙이 서로 다른 공자를 모시게 된 것은 좋은 일만은 아니었어. 제후 자리를 놓고 두 사람이 경쟁을 해야 했으니까. 역사 드라마에서 많이 봐왔겠지만 권좌에 오르지 못한 쪽은 처절한 복수를 당하는 것이 당시 보통 일어나는 일이었으니, 관중과 포숙 사이에도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왕의 아들은 왕자이지만 제후의 아들은 공자라고 해. 


희공이 우려했던 대로 양공의 권세는 오래 가지 못했어. 당시 양공의 사촌이었던 무지가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와 양공을 죽이고 권력을 차지하는 일이 생겼어. 요즘 말로 하면 쿠데타가 일어난 거지. 그런데 이 무지라는 인간도 성품이 아주 포악했어. 정통성도 없는데다 포악한 사람이 제후 자리를 오래 차지하기는 어려웠겠지. 자리를 차지한 지 두 계절이 못 되어 제나라의 대부들에게 처단되고 말아. 


두 벗의 생사를 건 경쟁


이 난리통이 일어나기 전에 포숙은 공자 소백을 데리고 이미 거나라로 피신해 있었고, 난리가 일어난 와중에 관중도 공자 규와 함께 노나라로 망명해 있었어. 소백은 제나라 안에 있던 대부들이 지지를 하고 있었고, 규는 노나라가 뒷배가 되고 있었지. 이제 제나라 주인 자리가 비어있으니 먼저 들어가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이 제후가 되는 상황이 되어버린 거야. 제나라의 대부들은 거나라로 몰래 사람을 보내 평소 지지하던 소백을 불렀지. 서열로 따지면 둘째인 규가 우선이고, 막내인 소백이 뒤였지만 비상상황에서 누가 그걸 알아주겠어. 두 공자들끼리 서로 제나라 먼저 들어가기 경주가 시작되었어. 더불어 두 공자를 모시던 친구 관중과 포숙도 누가 자기 주인을 제후로 만드느냐를 두고 일생일대의 경쟁을 시작하게 되었지.  

먼저 선수를 친 건 관중이었어. 관중은 노나라에 부탁해서 공자 규를 제나라로 달려가게 하고, 자기는 서둘러 소백이 거나라에서 제나라로 오는 길목에 매복을 했지. 아니나 다를까. 소백이 속도를 내 달려오는 것이 보였지. 관중은 직접 소백에게 화살을 쏘았어. 화살은 배꼽부분에 명중했어. 소백이 쓰러지는 것을 확인한 관중은 노나라에 연락을 해서 규를 호송하는 행군을 늦추었어. 승리는 관중의 것으로 보였지. 

엿새 만에 제나라로 들어가던 날, 관중과 규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어. 죽은 줄 알았던 소백이 살아서 이미 제나라에 들어와 있었던 거야. 내부에서 호응한 고혜라는 대부가 소백을 이미 제후로 삼아 환공이라는 이름으로 등극시킨 뒤였어. 제나라 군대가 관중과 규의 일행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실력행사를 했지. 어찌된 일일까. 

알고 보니 관중이 쏜 화살이 소백의 허리띠에 맞았던 거야. 청동으로 장식되어 있는 화려한 공자의 허리띠가 화살이 몸 속 깊이 박히는 것을 막았던 거지. 영리한 소백은 화살을 맞자 죽은 척을 했고, 온거(溫車, 장막을 친 긴 수레)에 타 모습을 숨긴 채로 재빨리 제나라로 달려갔던 것이지. 허리띠 하나가 제나라 제후의 역사를 바꾸었던 거야. 동시에 소백의 놀라운 임기응변 능력을 확인할 수 있고, 후에 제나라 환공이 된 후 왜 그가 패자가 될 수 있었는지도 조금 알 수 있지. 

행군을 늦추었던 관중은 후회했지만, 소용없었지. 후원하던 노나라도 한스럽긴 마찬가지였고. 그래서 관중과 노나라 장공은 아직 환공이 자리를 잡기 전에 제나라를 공격하기도 했지. 하지만 규모가 훨씬 작은 노나라의 공격 또한 소용없었고, 결국 관중은 공자 규를 제후에 앉히는데 완전히 실패했어. 


삼흔삼욕


제후가 된 환공은 자기의 목숨을 노렸던 관중과 공자 규, 그리고 그들을 도왔던 소홀이라는 모사를 모두 죽이려고 했어. 노나라가 힘이 약하니 그 나라를 압박하여 데리고 있는 그들을 죽이라고 하면, 손 안대고 모두를 죽일 수 있었지. 그러자 포숙이 환공을 말리고 나섰어. 

소홀 또한 관중, 포숙과 친구라고 전해지고 있어. 여기서는 관중과 포숙의 이야기에 집중해야 하니 길게 언급하지는 않을게. 


“신이 다행히 주군을 모시게 되었는데 주군께서 마침내 자리에 오르셨습니다. 저는 높은 자리에 오르신 주군을 더 높여드릴 수가 없습니다. 주군께서 장차 제나라를 다스리시려고 한다면 고혜와 저 포숙이면 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군께서 패자가 되고자 하시면, 관중이 아니면 안 됩니다. 관중이 노나라에 머물면 노나라가 강해질 테니 그를 놓치면 안 됩니다.”

제후국 하나를 다스리는 데는 고혜와 자기로 충분하지만, 다른 나라의 큰형 노릇하면서 다른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강력한 지배군주가 되려면 관중이 꼭 필요하다는 진언이었지. 어렵게 제후왕의 자리에 오른 환공은 그저 한 나라의 군주로 만족할 사람이 아니었어. 천하를 다스리고 싶었어. 그래서 자기를 죽이려고 활을 쏘고 실제 죽음 직전에 몰아넣었던 원수를 용서하고 긴히 쓰라는 포숙의 말을 받아들여. 형이지만 향후 권력의 위협이 될 수 있는 규는 노나라에서 죽게 하고, 관중은 제나라로 불러들였지. 환공은 그저 관중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었어. 노나라에서 오는 관중을 위해 세 번 향을 쐬고 세 번 목욕을 한 후, 교외에까지 나가 맞아 들였어. 그만큼 관중을 존중한다는 뜻을 보여준 거야. 

   여기서 삼흔삼욕(三釁三浴) 이라는 고사성어가 나왔어. ‘수어지교’ 편에서 본 삼고초려라는 말과 비슷한 말로 쓰이지. 인재를 얻기 위해 매우 노력하는 자세를 뜻하는 거야. 


그런데 관중이 뛰어난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대접할 필요가 있었을까? 관중은 귀족도 아니었고 이미 명성을 가진 사람도 아니었는데 말이야. 이 일은 제나라의 정치 구도를 살펴보아야 이해할 수 있지. 환공이 패자가 되기 위해서는 강력한 왕권을 행사할 필요가 있었지. 그런데 대개 제후국의 주요 신하들은 그 나라의 귀족들이 맡는 것이 일반적이었어. 귀족들이 중요 관직을 맡게 될 경우 그들의 힘이 강하기 때문에 제후가 힘 있게 자기 정책을 펴지 못할 가능성이 있지. 자기 나라를 평화롭게 다스리는 경우에는 서로 협력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패자가 되기 위해 부국강병을 이루려면 많은 개혁조치가 필요하고, 그러려면 내부의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등용되어 강력하게 정책을 실천해야 하겠지. 처음 환공은 그것을 포숙에게 맡기려고 했으나 포숙이 관중을 추천한 거야. 그리고 관중이 그 역할을 맡아 힘을 발휘하려면, 제후인 자신이 얼마나 그를 높이 평가하고 존중하는지를 다른 귀족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지. 그래서 환공은 삼흔삼욕하면서 관중을 맞아들인 거야. 우리는 이런 사례를 이미 앞에서 보았지. ‘토사구팽’ 편에서 말단 벼슬이던 한신을 맞아들일 때 유방이 성대한 의식을 치렀던 것, 기억나지? 옛 군주들은 아직 명성을 얻지 못한 인재를 등용시킬 때 이런 의식을 통해 자신이 지지한다는 사실을 명백히 드러내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인재의 가치를 널리 전파하는 방식을 쓴 거야. 그런 면에서 환공이 군주가 될만한 인물이란 것을 알 수 있지. 

나아가 포숙의 사람됨 또한 알 수 있어. 귀족을 견제하고 군주와 재상 중심의 개혁 정책만이 제나라를 부강하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건 포숙이야. 그리고 소백이 제후에 오르는 과정에서 믿고 따랐던 것도 포숙 자신이었고. 가만히 있었으면 포숙은 환공의 환대를 받으며 권력의 핵심에 올랐을 거야. 그런데도 그는 그 자리를 관중에게 양보했어. 앞서 보았듯이 언제나 자기 신세만 지던 그 친구에게 말이야. 포숙이 이렇게 객관적인 분석으로 일을 하지 않았다면 관중은 그냥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을 거야. 

그러니 관중이 포숙에게 고마워하지 않을 수 없었지. 이에 대해 관중은 이렇게 이야기 해. 

“공자 규가 싸움에서 졌을 때, 소홀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나 나는 붙잡혀 굴욕을 당했다. 그러나 포숙은 나를 부끄러움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자그마한 절개에는 부끄러워하지 않지만 천하에 이름을 날리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를 낳아 준 이는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이다.” 

원래 귀족 출신이 아닌 관중은 작은 절개를 지키기 위해 죽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어. 그보다 자기의 뜻을 펼치지 못한 것을 더 속상해 한 것이지. 그것을 포숙이 알아준 것이고. 그런 포숙을 부모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라고 했으니 포숙에 대한 최고의 고마움을 표한 것이야. 


재상 관중


이런 과정을 거쳐 관중이 제나라의 재상이 될 수 있었어. 젊은 시절 좌절을 거듭하고, 제후 즉위전에서 간발의 차로 실패를 하고 말았던 관중이 재상이 되어 과연 실력발휘를 했을까? 

포숙의 예측은 틀리지 않았어. 재상이 된 관중은 마치 그 자리가 자기 자리였던 양 대단한 능력으로 제나라를 변화시키기 시작했어. 아니, 제나라를 완전히 차원이 다른 나라로 만들어 버렸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거야. 사마천이 [사기열전]에서 표현한 관중의 성과를 옮겨볼게. 


관중이 정치에 임해 제나라의 재상이 되자 별 볼일 없던 제나라가 바닷가의 위치를 활용하여 교역을 통해 재물을 쌓았고,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군대를 강하게 했으며, 백성과 더불어 기쁨과 슬픔을 같이 했다. 
그가 논한 정책은 행하기 쉬웠다. 백성이 바라는 것은 그 바라는 대로 들어주고, 바라지 않는 것은 그대로 없애 주었다. 
정치를 하는 데 있어 화(禍)가 될 것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복을 만들고, 실패한 일을 돌이켜 성공으로 바꾸었다. 일의 경중을 잘 살피고 득실을 따지는데 신중했다.


이 이상의 칭찬이 있을까? 그는 중국 중심에서 보면 동쪽 해안가 변방에 위치한 제나라를 오히려 그 지리상의 이점을 살려 당시의 최대 교역을 행하는 제후국으로 만들었어. 실질적인 경제정책으로 나라를 부유하게 했어. 그의 경제에 대한 전략은 매우 놀라운 수준이어서 많은 역사학자들이 관중을 역사상 최초의 경제학자라고도 일컫기도 해. 또 군사제도를 혁파해서 군대가 강한 나라를 만들었어. 농지를 중심으로 농민들을 자발적 군인으로 제도화한 재상이었지. 관중의 이런 군사제도는 전국시대에 들어와서는 중국 전역으로 퍼지게 돼. 그의 정책은 합리적이어서 따르기가 쉬었다는 얘기도 덧붙여져 있지. 관중은 많은 좌절을 겪었지만 그런 과정에서 백성들의 밑바닥 인생을 많이 체험했어. 그 체험을 정책에 반영하니 백성들이 따르기 쉬울 수밖에. 백성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원하지 않는지 알고 있으니 그대로 행하면 백성이 따라오게 되어 있었어. 그리고 정치를 하는데 독단적이지 않고 물 흐르듯이 일이 되는 방향으로 진행했어. 작은 이익을 내 주고 큰 이익을 얻을 줄 아는 사람이었지. 항상 명분을 틀어쥐고 일을 했기 때문에 정의의 편에 선다는 평가를 잃지 않았어. 관중은 일과 관련하여 스스로 이렇게 말했어. 


창고가 가득 차야 예절을 알게 되고, 입고 먹는 것이 풍족해야 명예와 치욕을 알게 된다. 임금이 법도를 따르면 육친(아버지, 어머니, 형, 동생, 아내, 자식)이 굳게 결속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네 가지 강령(예의, 정의, 깨끗함, 부끄러움)을 펼치지 못하면 나라는 멸망한다. 샘에서 물이 흘러나가듯 명령을 내면 그 명령은 백성의 마음에 순응하게 된다.


경제가 살아나야 백성을 데리고 개혁을 할 수 있다는 말이야. 백성의 삶이 풍족해야 다른 문화가 발전한다는 것이고. 위에서부터 모범을 보여야 백성들이 따른다는 말이고. 이런 정치를 폈기 때문에 제나라는 춘추시대의 첫 번째 패자가 될 수 있었고, 환공은 첫 번째 패왕이 될 수 있었어. 

이후 제나라는 관중의 정책을 잘 유지해서 후에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할 때까지 항상 강대한 나라로 존재했지. 그리고 관중은 평민이 재상이 된 가장 훌륭한 시범 사례로 중국 전체에 회자되기 시작했고, 이후 선비[士]들이 앙망하는 존재가 되었어. 춘추전국 시대에 군주들에게 유세(遊說)하러 다닌 지식인들의 목표는 모두 관중처럼 재상이 되는 것이었다고도 볼 수 있지. 또 춘추전국 시대 다른 나라 군주들도 출신보다 능력을 먼저 따져 인재를 등용하는 계기가 된 것은 물론이고. 사형수에서 일약 재상으로 발돋움한 관중의 사례가 언제나 중국을 매력적인 인재로 들끓게 하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한 거야. 

관중이 다스릴 때 포숙의 지위는 관중 아래였지만, 포숙의 자손들은 대대로 제나라의 봉록을 받으며 풍족하게 살 수 있었으니 포숙의 판단도 그만큼 대가를 얻은 셈이야. 그들의 우정, 나라를 위한 합리적 우정이 둘 모두를 살렸다고 할 수 있지. 


공정한 우정


대개 여기까지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관포지교의 내용이지. 하지만 이들의 우정이 진짜 합리적이고 대의를 위한 것이었음은 그 뒤의 이야기까지 다 살펴보아야 알 수 있어. 

관중에게도 세월은 비켜가지 않아, 패업을 이루고 제나라를 최고의 나라로 만든 그에게도 죽음이 찾아왔지. 그를 믿고 그와 함께 개혁의 길을 달려왔던 환공이 그의 침상 앞에서 물었어. 이제 누구와 함께 정치를 해야 하냐고. 관중은 차마 대답하지 못했지. 그러자 환공이 포숙은 어떠냐고 물었어. 이 때 관중이 어떻게 대답했을까? 젊은 시절 자기를 끝까지 후원해주고, 죽음에서 건져 재상을 만들어 준 친구가 어떠냐고, 군주가 물어왔을 때 관중의 대답 말이야. 보통 사람 같으면 죽기 직전에 은혜를 갚는다고 포숙을 추천했겠지. 그러나 관중의 대답은 이외였어. 

“포숙은 군자입니다. 천승(천 개의 수레)의 나라라도 도에 어긋나면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정치를 할 수 없습니다. 그의 사람됨이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심히 미워합니다. 한 가지 악을 보면 종신토록 잊지 않습니다.” 

포숙의 성격이 너무 강직해서 때로 유연하게 대처해야 하는 정치 현장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평가였어. 그러니 재상감이 아니라는 거지. 그것이 관중이 포숙에 대해 내린 공정한 평가였어. 부모보다 소중한 친구이지만 나라의 운명 앞에서 그에 대한 평가를 더 보태거나 더 빼지 못했던 거야. 그래서 결국 관중이 죽은 후에 포숙은 제나라의 재상이 되지 못했어. 

관중의 이런 행동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관중이야말로 진짜 벗으로서 행동한 것이 아닐까? 만약 포숙의 능력이 부족한데도 옛 도움을 생각해서 관중이 그를 재상에 추천했다고 치자. 그러면 포숙이 과연 재상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었을까? 재상이라는 명성은 얻었겠지만 아마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거야. 정치의 어려움은 때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수도 있으니 상상을 초월한 어려움도 있을 수 있겠고. 그러니 정말 포숙을 생각한다면 환공의 아름다운 신하, 나라의 2인자로 놔두는 것이 더 그를 위하는 것이었겠지. 이런 관중의 태도야말로 참다운 우정을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해. 앞서 밝혔듯이 포숙은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렸으니 관중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보여주지. 


이제 관중과 포숙의 우정이 왜 공정한 우정을 대표하는지 이해하겠지? 포숙은 관중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의 재능과 가능성을 공정하게 인정하고 그를 재상의 자리에 앉혔고, 관중은 포숙의 은혜에도 불구하고 그를 공정하게 평가해 나라의 어진 신하로 머무르게 했어. 얘들아, 너희들도 이렇게 공정한 사귐을 나눌 벗이 주변에 있니? 참된 우정이란 무조건 친구를 위해 매진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 것 같다. 서로를 공명정대하게 인정하는 태도가 지속되는 게 참된 우정이 아닐까 싶어. 정정당당한 삶으로 서로를 이끌어주는 우정을 나누며 살기를 아빠는 마음 속 깊이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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