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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산 May 16. 2024

충신의 진정한 아름다움, 수어지교(水魚之交)

- 진수, <삼국지(三國志)> ‘제갈량열전’에 바탕을 둔 고사성어

얘들아. 너희들에게 네 번째로 들려주고 싶은 고사성어는 수어지교라는 말이야. 물[水]과 물고기[魚]의[之] 사귐[交]이라는 뜻이야. 혹시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를 본 적 있어? 낚시에 걸린 물고기를 땅바닥에 놓으면 몹시 힘들어하잖아. 그러다 그 물고기를 물에 다시 풀어주면 정말 행복하게 헤엄치며 나아가잖아. 물고기에겐 물처럼 편안하고 행복한 공간이 없지. 마치 물고기가 물을 떠나 있다가 다시 물을 만난 것처럼 행복한 사귐을 수어지교라고 해. 그 행복한 사귐의 주인공은 제갈량(諸葛亮)과 유비(劉備)야. 제갈량의 자가 공명(孔明)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소설 <삼국지연의>의 영향을 받아서 제갈공명이라고 말하면 더 잘 아는 것 같아. 유비는 촉한의 임금이고 <삼국지연의>의 주인공이기도 하지. 이 두 유명 인사의 만남이 수어지교인 거야. 유비가 제갈량을 신하로 얻게 되었을 때 유비는 “내게 공명이 있다는 것은 물고기가 물속에 있는 것[魚之有水]과 같소.”라고 말한 적이 있어서 이런 말이 남아있는 것이지. 그만큼 값지고 행복한 만남이었다는 말이야. 얼마나 좋았으면 이렇게 얘기했을까? 이제 그 이야기를 들려줄게.


제갈량을 이야기하기 전에 당시 상황에 대해 살펴볼까? 때는 유방이 중국 천하를 통일하며 세운 한나라가 수백 년이 흐른 뒤 망해가기 시작할 즈음이야. 임금 곁에는 열 명의 환관들이 나랏일을 좌지우지하고 있었고, 그 곁에서는 외척(外戚)들이 그 권력을 견제하며 자기 몫을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지. 임금이 힘을 쓰지 못하고 양쪽으로 휘둘리니 나라꼴이 제대로 될 리가 없겠지. 중앙 정부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서 관리들이나 귀족들이 모두 제 몫 챙기기에 나서니 죽어나는 것은 백성들뿐이었어. 참다못한 백성들이 스스로 군대를 조직해서 나라를 엎으려고 민란(民亂)을 일으키기 시작했지. 장각이라는 사람이 이끈 황건적의 난이 당시 가장 큰 민란이었어. 차별 없고 태평한 새로운 세상을 비전으로 제시하며 백성들을 모아 군대를 만들어 한나라 조정에 대항했는데 초기에는 엄청난 기세를 가지고 있었어. 한나라 전체가 위기에 빠져 버리게 되었지. 이에 한나라 임금은 각 지역의 실력자들에게 구원요청을 하여 전 병력을 황건적을 막는 데 쓰게 돼. 그래도 정규군은 정규군인지라, 평소에 농사만 짓던 농민들이 대다수인 황건적 군사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싸움에서 힘을 잃게 되지. 9개월이나 계속 된 전투 끝에 황건적의 주력이 궤멸되어 버려. 한나라는 큰 위기에서 간신히 벗어나게 되지.


하지만 늑대를 막고 나니 호랑이가 오는 격이랄까? 황건적을 막기 위해 군사력을 동원했던 각 지방의 실력자들이 저마다 자기 지역에서 임금 노릇을 하기 시작한 거야. 예나 지금이나 중국 땅은 너무 넓어서 중앙 정부의 힘이 약해지면 바로 지역 군벌(軍閥, 군사력을 기반으로 지역에서 왕노릇하는 세력)들이 활개를 치곤 하지. 가장 최근에는 지금의 사회주의 중국 정부가 들어서기 전에도 군벌들이 지역마다 정부를 대신하여 지배자 노릇을 한 예가 있어. 군벌들이 나타난다는 이야기는 이제 새로운 왕권을 위해, 중국 천하의 새로운 주인을 위해 그 실력자들이 서로 다투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하는 거지. 이미 한나라 조정은 민란을 막을 수 없을 정도로 약해졌으니 자기 지역에서 실력을 키우다가 스스로 중국의 황제가 되려는 욕망이 군벌들 사이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한 거야. 이것이야말로 한나라의 몰락을 이끄는 가장 큰 원인이었지. 바야흐로 새로운 호걸들의 쟁투가 시작된 거야.


이 쟁투 속에서 차차 조조라는 사람이 최고의 실력자로 부상하게 돼. 소설 <삼국지연의>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간신의 대명사 조조. 소설이 아닌 실제 조조는 기회를 잘 포착하고 남다른 실천력으로 권력을 잡아간 시대의 호걸이었지. 그의 집안은 그리 내세울 게 없었어. 조조의 아버지가 환관의 양자로 들어가서 집안을 잇게 되었거든. 그래서 원소같이 집안이 좋은 호걸들이 ‘환관의 자식’이라고 놀리곤 했지. 그러거나 말거나 조조는 당당한 태도로 사람들의 신망을 얻어갔고, 결정적으로 낙양으로 돌아와 한나라를 재건하려고 애쓰는 헌제를 적극적으로 도우며 ‘한나라의 수호자’라는 명분을 틀어쥐게 되었어. 그 명분으로 승상(오늘날의 국무총리) 자리에 올라 중국 전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군벌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며 중원의 패자(覇者)가 되지.

조조는 소설 속의 잔인하고 무도한 권력욕의 화신이 아니었어. 누구나 중국 천하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시기에 그 기회를 잘 잡아 이루어냈을 뿐이지. 후에 한나라 황제를 폐하고 스스로 황제가 된 것도 조조가 아니라 조조의 아들이었어. 어찌되었건 조조는 황제를 보필하는 승상의 자리에 머물렀지. <삼국지연의>에서 유비를 주인공으로 하려다보니 조조가 아주 나쁜 사람이 된 셈이야.
아다시피 환관은 자식을 낳을 수 없었지. 그런데 힘과 돈은 있었어. 그래서 자주 양자를 들여 자기 집안을 형성하는 경우가 있었지. 조조의 경우도 그래서 환관의 후예가 되어 조씨 집안을 형성하게 된 거야. 참고로 조조의 아버지의 원래 성씨는 ‘하후’씨였어. 그래서 <삼국지>나 <삼국지연의>를 보면 조조를 돕는 사람들 중 ‘하후’ 씨가 많은 것을 볼 수 있어. 명장 하후돈이 대표적인 사례이지.

이제 조조에게 맞설 만한 상대로는 손권이 이끄는 강동(江東)의 오나라, 유표가 영향력을 행사하던 형주, 한수가 지배하던 서량(西涼) 정도가 남아있었지. 그러나 대등한 힘을 가진 것은 아니었고 늘 조조의 중원을 조심해야 하는 상대였지.      

형주(荊州)는 지금의 호북성(湖北省), 호남성(湖南省) 일대를 말하고(앞서 ‘괄목상대’ 편에도 나오지?), 서량(西涼)은 지금의 감숙성(甘肅省) 일대를 말해.       


그런데 이렇게 역사가 흘러가는 동안 제갈량과 수어지교를 맺어야 하는 유비는 뭘 하고 있었던 걸까? 유비는 한나라 황제의 먼 친척이라는 것 외에는 배경으로 내세울 것 없는 사람이었어. 사람됨이 진중하고 의리가 있어서 주변에 사람이 많았지. 특히 관우와 장비는 평생을 함께 하는 장수로 <삼국지연의>에서 ‘도원결의’의 이야기를 남길 정도였어. 유비는 관우, 장비와 함께 황건적의 난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우면서 주목받기 시작해. 그러나 독자적 세력을 갖출 정도는 못 되어서, 동문수학(同門受學) 했던 공손찬의 부하로 들어갔다가, 공손찬이 원소에게 패하자, 조조의 부하로 들어갔다가, 조조를 배신하고 원소의 부하로 들어갔다가, 같은 황족인 유표에게 의지하게 되지. 자기 지역 기반을 갖추지 못하고 부박하게 떠돌아다녔던 거야. 그러니 같이 떠돌아다녀야 하는 따르는 자들의 고난도 만만치 않았지. 관우와 장비의 고난 말이야. 관우는 유비와 헤어져서 조조 밑에 그대로 있다가 간신히 달아나 유비에게 돌아오기도 했어. 유표에게 의탁하기까지 떠돌이 용병(用兵) 신세였던 것이지.      

유비는 황제와의 친족 관계로 흔히 ‘유황숙(劉皇叔)’ 즉 황제의 삼촌이라고 불리곤 했어. 그게 가장 큰 자산이었지. 왜냐하면 한나라의 정통을 잇는 사람이었으니까. 조조나 손권은 한나라의 황족과 성씨가 달랐지만 유비는 같은 성씨였고 그래서 후대 역사가들은 삼국 중 세력이 가장 약했음에도 유비를 정통으로 꼽았던 거야.     


유비는 유표에게 와서야 겨우 친척이라는 인연으로 신야라는 작은 지역을 얻어 다스리게 돼. 사십 줄에 들어서서야 용병 신세를 벗어났으니 늦깎이 출세였지. 그가 한나라 종친(宗親)이라는 명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자리 잡기 어려웠던 가장 큰 이유는 격동기를 뚫고 나가 기반을 다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전략가를 곁에 두지 못했기 때문이었어. 개별적인 싸움은 관우, 장비와 더불어 잘 해나갈 수 있었으나 그것으로 어떤 이익을 얻고 어떤 비전을 가져야 할지 큰 그림을 그려주는 사람이 곁에 없었던 거야. 그래서 유비는 안정을 찾자마자 자기를 도울 전략가를 찾기 시작했지.

그러다 서서라는 사람을 통해 제갈량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어. 공부를 많이 하고 중국 천하를 경영할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때를 기다리서 시골에 숨어 살고 있는 선비 이야기를 말이야. 뛰어난 능력을 감춘 채 은거하고 있다고 해서 제갈량의 별명이 와룡(臥龍)이었어. 와룡, 누워있는 용. 언제든 기회만 되면 솟아올라 세상을 호령할 사람이라는 뜻이었지.

그 이야기를 들은 유비는 제갈량에게 달려가 자신의 모사(謀士)가 되어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지. 그런데 제갈량이 쉽게 유비의 편을 들지 않았던 모양이야. 유비는 세 번이나 제갈량이 살고 있는 시골의 초가집을 찾아가고서야 제갈량을 만나 자신의 전략가가 되어달라고 부탁할 수 있었어. 여기서 그 유명한 ‘삼고초려(三顧草廬)’라는 말이 나오게 되지. 지금도 뛰어난 인재를 모시기 위해 공을 들일 때 이 말을 쓰곤 해.      

<삼국지연의>에서는 ‘삼고초려’ 이야기가 아주 재미있게 부풀려져 있어. 유비가 찾아왔는데도 제갈량이 일부러 자는 척을 하면서 유비의 인격을 시험해보았다던가 하는 식으로. 정사(正史)에는 유비가 세 번 찾아간 것은 기록되어 있지만, 구체적으로 제갈량이 어떤 태도로 세 번 유비를 맞았는지에 대해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 그러니 <연의>의 작가가 그럴듯하게 창작할 수 있었지.      


유비를 만난 제갈량은 유비를 위해 천하를 차지할 수 있는 비책을 전해. 부실한 지도자인 유표가 지키고 있는 형주를 차지하고 형주와 맞닿아 있는 익주(지금의 서천(西川, 쓰촨) 지역)로 진출하여, 중원을 차지하고 있는 조조, 강동을 차지하고 있는 손권과 권력을 삼분하라는 것이었지. 일단 그렇게 솥의 세 발처럼 중국 천하를 세 개로 나누어 지배하고, 그 한 축을 차지한 후 힘을 모아 다른 지역을 도모하라는 것이었어. 이것이 그 유명한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 천하를 셋으로 나누어 차지하다는 계책)’였어.    

중국의 고대 솥은 다리가 세 개였어. 그래야 솥을 놓는 표면이 울퉁불퉁해도 자를 잘 잡고 솥이 넘어지지 않았지. 네 다리 솥은 표면이 울퉁불퉁하면 뒤뚱거리지만 세 발 솥은 그렇지 않아. 그래서 옛 사람들은 권력이 삼분되었을 때 균형이 잡힌다는 비유적 인식을 하곤 했지. 그러고 보니 맞는 말이야. 가위바위보도 세 가지니 경쟁이 되는 것이고, 현대 권력도 행정부-입법부-사법부가 셋으로 분권되어 있잖아?    


이 계책을 듣는 순간 유비는 참으로 기뻤어. 형주의 한 지방 신야를 차지하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세월만 보내던 유비에게 명확한 방향을 제시해주는 이야기였기 때문이지. 이제 민심을 얻어 형주를 얻고 익주로 진출하면, 중국 서남쪽의 거대한 부분을 차지할 수 있다는 비전이 생긴 거야. 비전을 이루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려고 유비와 제갈량은 날마다 담소를 나누었고 자연히 깊은 관계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어. 그러자 원래 친형제처럼 우의가 깊고 함께 산전수전 다 겪은 관우와 장비가 기분이 좋을 리 없었어. 그들이 유비에게 불만을 이야기하자, 유비가 앞서 그 말을 한 거야.


“내게 공명이 있다는 것은 물고기가 물속에 있는 것과 같소. 바라건대 그대들은 다시 불만을 말하지 마시오.”


유비와 제갈량의 관계를 보면서 진정 필요한 관계란 서로를 보완해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돼. 싸울 능력을 갖춘 유비에게는 천하를 보는 전략가가 필요했고, 천하를 얻을 계책을 가지고 있던 제갈량에게는 나아가 싸워줄 사람이 필요했지. 그 둘의 필요가 딱 만나니 크나큰 시너지 효과가 나오게 되었던 것이지. 모자람을 채워주는 사이, 우리에겐 누가 그런 사이일까?

유비가 형주에서 제갈량을 만나 전략을 짜나가고 있을 때, 마침 형주의 지배자 유표가 노환으로 세상을 뜨게 돼. 유표의 자식들이 아직 힘이 없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유비가 무력으로 유표의 자리를 얼마든지 차지할 수 있었지. 그러나 유비는 그렇게 하지 않았어. 권좌를 빼앗았다는 말을 듣게 되면 민심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었지. 그러는 사이 유표의 첩에게서 난 둘째 아들 유종이 형주의 권좌를 차지하게 되지. 유비는 당장의 이익을 놓친 셈이야. 하지만 형주 백성들의 지지를 얻게 되어 멀리 보면 큰 이익을 얻은 셈이었지.    

장남 유기는 계모의 등쌀에 멀리 하구라는 지역의 방비를 맡아 떠나 있는 상태였어. 계모의 살해 위협을 피해 떠나도록 조처해 준 것이 바로 제갈량이었고, 이후 유기는 제갈량과 유비의 편에 서게 돼.      


언제나 지도자가 교체될 시기는 위기의 순간이기도 해. 형주의 유표가 죽자, 중원을 차지하고 있던 조조는 그 혼란의 틈을 타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형주를 차지하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오게 돼. 조조군의 위세에 놀란 새로운 지도자 유종은 그만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을 하고 말아. 아버지가 잘 지켜온 땅을 한순간에 넘겨버린 것을 보면 좋은 후계자는 분명 아니었지. 조조는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형주를 차지하게 되었어.

유비는 또 한 번 후퇴할 수밖에 없었어. 당장 조조의 대군을 맞서 싸울 힘이 없었던 거지. 신야에서 남쪽으로 물러나는데 수많은 백성들이 따라왔어. 조조보다는 덕망 있는 유비와 함께 살고 싶다고 따라나선 것이었지. 형주를 무력으로 차지하지 않는 유비의 모습에서 백성들은 희망을 보았던 거야. 그러나 많은 백성을 데리고 가다보니 조조의 공격망에서 벗어나기가 난망했지. 겨우 유표의 장남이 머무르던 하구까지밖에 물러나지 못했어. 유비 단독으로 조조에 맞설 수도 없고, 피난 속도가 느리니 한없이 달아날 수도 없고 진퇴양난에 빠졌던 거지.


유비가 살아날 길은 무엇이었을까. 딱 한 가지 방법이 있었어. 강동의 손권과 손잡고 그의 힘을 빌어 조조를 물리치고, 형주를 다시 기반으로 삼는 것이었지. 그런데 문제는 손권이 유비와 손잡고 조조와 싸우겠냐는 것이지. 실제로 강동 오나라의 많은 대신들은 조조와 화친하고 신하관계로 버티는 것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 훨씬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있었어. 조조와 싸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주유나 노숙 등 일부 신하에 지나지 않았어. 그런 상황을 바꾸어 손권이 조조와 맞설 수 있게 만들어야만 했어. 그 일을 누가 할 수 있을까. 그래, 바로 최고의 전략가 제갈량이 아니겠어. 유비는 제갈량에게 손권과의 동맹을 이끌어 내달라고 부탁했어.


이즈음 손권은 군대를 모아 형주 근처 시상에 머무르면서 조조군의 동향을 살피고 있었어. 제갈량이 손권을 만났어. 제갈량이 어떻게 손권을 설득했을까?

제갈량이 먼저 손권에게 말했어.

"조조의 힘이 강대하니 어서 빨리 신하의 관계를 맺고 투항하시길 권합니다."

투항할지, 맞설지 고민 중이었던 손권은 막상 어서 투항하라는 말을 들으니 은근히 자존심이 상했어. 그래서 되물었지. 그러면 왜 유비는 조조에게 투항하지 않느냐고. 제갈량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어.

“우리 유황숙께서는 황실의 후예로서 뛰어난 재능이 세상을 덮고 많은 선비가 흠모하고 있는 것이 마치 물이 바다로 흘러가는 것 같은데, 저항하다 성공하지 못하면 하늘의 뜻일 뿐 어찌 다시 조조의 신하가 될 수 있겠습니까!”

너 같은 인간은 항복해야 하겠지만, 유비는 고결한 사람이어서 항복할 수 없다는 속뜻이 담긴 말이었지. 일부러 손권의 자존심을 확 긁어놓은 거야. 아니나 다를까. 손권은 그 말에 발끈 화를 내면서 말했어.

“오나라는 넓고 나는 10만의 병사를 거느리고 있는데 내가 누구의 지배를 받아야 한단 말이오. 나는 맞서 싸우겠소. 그런데 유황숙이야말로 조조를 감당할 사람이지만, 막 패배한 후인데 어떻게 조조에 맞설 수 있단 말이오?”

제갈량의 화술이 대성공을 거두는 순간이야. 결전의 의지를 손권에게서 끌어냈으니 말이야. 손권이 싸우기로 각오하긴 했지만, 아직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은 못 가졌어. 제갈량은 손권이 의심하는 승리 가능성에 대해 두 가지 근거를 들어 대답해. 첫째는 조조의 군대가 먼 길을 오느라고 매우 지쳐있기 때문에 실제로 큰 힘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지. 특히 유비를 잡으려고 정예부대를 하루 낮밤 사이에 300여 리나 행군시켰기 때문에 전투 능력이 많이 떨어졌음을 강조했어. ‘제 아무리 강한 활에서 떠난 화살이라도 끝에 가서는 노나라의 명주조차 뚫을 수 없다’라는 상태라고 말했지. 춘추전국 시대 공자의 고향인 노나라는 얇고 부드러운 비단의 생산지로 유명했어. 오래 날아온 화살은 힘이 떨어져 그 얇고 부드러운 비단조차 뚫을 수 없다는 것이야. 멋진 비유지. 다른 한 가지는 조조의 군대가 북방 사람들이기 때문에 수전(水戰)에 약하다는 것이었지. 지금 중국에 가보아도 알겠지만, 장강(長江)을 중심으로 그 이북은 평야지대이고 그 이남은 호수와 물이 많은 지형이거든. 그러니 중원에서의 전쟁은 평지에서 싸우는 전차전 등이 많았고, 강동에서의 전쟁은 주로 수전이 많았어. 그러니 강동에서 벌어지는 수전에서는 많이 싸워본 오나라가 유리하다는 것이었지.


제갈량 상상도. 대개 깃털 부채를 들고 있는 지혜로운 모습이면 제갈량이다.  


제갈량의 이야기를 듣고 손권의 의심은 씻은 듯 사라졌어. 바로 주유, 정보, 노숙 등 수군 3만 명을 보내 제갈량과 함께 유비가 있는 곳으로 가서 힘을 모아 조조와 싸우게 했어. 손권이 제갈량 덕분에 싸우자고 주장한 주유나 노숙 등의 말을 믿게 되었다는 게 더 정확할 거야.


이 전투가 바로 그 유명한 적벽대전이야.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이 전투를 마치 제갈량이 이끌고 간 것처럼 묘사했지만, 실제 전투를 승리로 이끈 주역은 오나라의 모사 주유와 장수 황개였어. 주유는 적벽전쟁 전반을 지휘했어. 황개는 거짓 항복을 하여 적진 가까이 다가가 조조 수군의 배에 불을 지르는 화공을 통해 승리에 결정적 역할을 하지. 거기에 북방에서 먼길을 온 조조군대는 남방의 풍토병에 시달리느라 적의 화공에 제대로 대응도 못하고 물러나게 되지. 이 전투는 한동안 조조의 남방 정벌을 막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것이었어.


전투를 주도한 오나라는 조조를 막고 영토를 수호했다는 자부심을 얻을 수 있었어. 그것은 큰 소득이었지만, 유비의 소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어. 유비의 세력은 적벽대전의 조연 역할을 하고도 형주를 차지할 수 있었어. 유비가 유표의 먼 친척이며, 황숙이라는 등의 명분으로 오나라에게 형주를 빌려 쓰는 조건이었지. 하지만 말이 빌리는 것이었지 그냥 차지했다고 보는 게 옳아. 오나라도 조조와 직접 맞서야 하는 형주를 지배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는지 그냥 유비에게 형주를 넘겨주었어. 아마 세 세력의 균형이 오히려 필요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당시 노숙의 견해 등을 종합해보면 말이야. 어쨌든 유비는 드디어 넓고 중요한 지역을 다스리는 지역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어.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물론 제갈량의 전략과 외교술 덕분이었어.


이제 유비에게 남은 일이 무엇일까. 먼저 제갈량이 시골에서 나오면서 유비에게 한 말을 기억해? 그렇지. 이제 익주, 즉 지금의 서천을 차지하여 더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는 일이 남았지. 유비는 형주를 관우에게 맡기고 방통이라는 새로운 전략가와 익주의 신하이지만 유비를 따르던 전략가 법정과 힘을 합쳐 익주를 차지하게 돼. 이번에는 익주의 지도자인 유장을 돕는 척 하다가 그대로 성도로 쳐들어가 유장을 권좌에서 끌어내리지. 일종의 속임수를 쓴 거야. 모사 방통을 전투에서 잃는 피해도 있었지만 덕분에 매우 빠르게 익주를 차지할 수 있었어. 형주에서 권좌를 탐내지 않던 모습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야. 이번에는 형주를 차지할 때처럼 여론을 만들어야 할 필요가 없었던 거지. 그래도 유비답게 한 번은 돌아가는 길을 택해. 장로라는 서북지역 군벌이 익주를 위협하자, 유장이 수비를 위해 유비를 먼저 불러들여. 그때 바로 권좌를 빼앗을 수 있었지만, 유비는 그리 하지 않고, 장로와 맞서는 지역까지 갔다가 익주의 여론을 두루 살핀 후에 되돌아와 치는 방법을 택해. 배신자라는 말을 듣지 않으려는 유비의 노력이라고 할까. 격변기에는 충정이나 의리라는 것도 이익에 따라 달라지는 것임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야.


익주를 차지하고 나니 유비는 중국의 서남쪽을 차지한 임금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어. 조조의 부하로, 원소의 부하로, 유표의 부하로 떠돌던 유비의 성공은 정말 눈이 부실 정도였지. 이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유비 자신의 뛰어난 능력과 실천의 힘 덕분이었겠지만, 그 일을 가능하도록 전략을 제시하고 물 샐 틈 없이 뒷받침해준 제갈량의 역할이 절대적이었어. 후에 유비는 조조의 아들이 한나라 황제를 폐하고 스스로 위나라를 만들어 황제를 칭하자, 자신도 익주와 형주를 아울러 촉나라라 칭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물론 유비에게는 유씨 성을 가진 자로서 한나라를 계승한다는 명분이 있었지. 뒤이어 오나라도 스스로 독립을 하게 돼. 후대 유학자들이 위, 촉, 오 세 나라 중 위나라가 가장 강성하고 중원을 차지한 나라였음에도 촉나라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것은 유비가 한나라의 혈통을 이어받았기 때문이야. 보잘것 없는 용병이 한나라를 이어 황제가 되는 지위까지 나아간 거야. 이보다 멋진 성공담이 또 있을까?. 황제가 된 유비는 당연히 제갈량을 승상의 지위에 올렸지. 제갈량도 주군을 잘 선택해 시골 선비에서 만인지상의 승상이 될 수 있었어.


한 번 유비의 편에 서서 일하기 시작한 이후, 제갈량은 두 마음을 품는 법이 없었어. 언제나 유비와 촉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했지. 촉의 승상이 된 후, 관우가 오나라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관우의 복수를 한다고 나서다 장비가 내부 반란으로 죽고, 유비마저 손권과의 기나긴 싸움에서 병사하게 되도록, 그는 촉의 신하로서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나라를 지켜나갔지. 그에 대한 유비의 신뢰가 얼마나 컸는지는 유비가 남긴 유언을 보면 알 수 있어. 유비는 죽어가면서 승상 제갈량을 불렀어. 그리곤 모든 뒷일을 제갈량에게 부탁했지.

"승상의 재능은 조비(위나라를 세워 스스로 황제의 지위에 오른, 조조의 아들)의 열 배는 되니 반드시 나라를 안정시키고 큰일을 이루리라 믿소. 만일 세자가 보좌할 만한 사람이면 그를 보좌하고, 그가 재능이 없다면 당신이 스스로 취하시오."

나라를 위해 제 자식보다 제갈량을 높이는 유언이었어. 그만큼 제갈량을 믿는 것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제갈량에게 충성을 요구하는 반어법의 말이기도 했지.

제갈량이 대답해.

"신은 온 힘을 다하여 충성의 절개를 지켜 죽을 때까지 이어가겠습니다."

당신이 죽더라도 후계자에게 죽을 때까지 충성을 지키겠다고 약속했어. 제갈량의 충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유비는 아들 유선에게 승상을 아버지처럼 모시라는 조서를 내렸어. 제갈량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조서였지.

제갈량은 유비가 죽고나서 정말로 최선을 다해 그 아들 유선을 섬기고 나라를 위해 일했어.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있어서는 중국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행정가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싶어. <삼국지>를 쓴 진수는 제갈량에 대해 이렇게 평했어.      


제갈량은 승상이 되어 백성을 살피면서 예의와 법도를 보여 주었고, 관직을 간소하게 하고 때에 알맞은 제도를 따랐으며 성실한 마음으로 공정한 정치를 시행했다. 충의를 다하고 나라에 이로움을 준 사람에게는 비록 원수라도 반드시 상을 주고, 법을 어기고 태만한 자에게는 가까운 사람이라도 반드시 벌을 주었다. 죄를 인정하고 반성하는 이에게는 무거운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반드시 풀어 주었으며, 진실을 말하지 않고 말을 교모하게 꾸미는 자는 비록 가벼운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반드시 사형에 처했다. 선을 행하면 작은 일이라도 상을 주지 않은 적이 없고, 사악한 행동을 하면 사소한 것이라도 처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여러 사무에 능통하고 사물의 본질을 이해했으며, 명분을 따르면서도 실질을 구하며, 거짓을 말하는 사람과는 함께하지 않았다. 그 결과 촉나라 사람은 모두 그를 존경하고 아꼈으며, 형법과 정치가 엄격해도 원망하는 이가 없었다.     


그가 얼마나 사심 없이 공정하게 일을 처리했는지는 '읍참마속(泣斬馬謖)'이라는 고사성어에서도 확인할 수 있어. 제갈량이 매우 아끼던 신하 중에 마속이라는 사람이 있었어. 그가 위나라와의 전투 중에 제갈량의 명을 어겨 그만 전투에 패하게 된 일이 있었어. 전투에 패하는 일이야 장수로서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명을 어긴 것은 가볍게 여길 것이 아니었어. 제갈량은 앞뒤 재지 않고 군령을 어긴 마속을 그대로 참수하여 명을 어긴 책임을 묻고 병사들에게 사죄했어. 그리고는 스스로 자신의 지위를 세 단계 아래로 강등시켜달라고 유선에게 청하지. 공익을 위해 칼날처럼 바르게 살았던 제갈량의 모습을 잘 알 수 있어.


그는 나라를 잘 다스리는 일에만 애쓴 것이 아니라, 위와 오를 정벌하여 천하를 통일하는 일에도 매진했어. 험준한 촉의 벼랑길을 따라 북진 통일을 위해 여러번 출정했지. 출정할 때마다 후임 황제 유선에게 '출사표'를 쓰곤 했는데 그 글이 또 중국이 낳은 최고의 명문장으로 꼽혀. 여기서는 자세히 말하기 어렵지만, 나중에 찾아서 읽어보렴. 충절을 다하는 신하의 자세가 거기에 감동적으로 드러난단다. 그러나 그 글과는 달리 북벌에 성공하지는 못해. 촉의 벼랑길은 적이 쳐들어오기도 힘들지만, 아군이 적을 치기에도 힘든 곳이었지. 여러 발명을 하여 군량미와 군수물자를 나르며 전투를 치루면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지만 늘 장기전을 버티지 못하고 물러나곤 했지. 나중에는 적과의 대치 지역에 둔전(屯田, 주둔지에 논밭을 만들어 군사들이 직접 식량을 생산하는 제도)을 두어 군량을 보급하면서 장기전에 대비했는데 그만 지나친 과로로 몸져 눕게 돼.


결국 제갈량은 그대로 유명을 달리 하게 돼. 그리곤 적과의 대치 지역인 한중의 정군산이라는 곳에 묻어달라고 유언하지. 죽을 때까지도 나라를 지키고 중국을 통일하겠다는 유비와의 약속을 지키려고 했던 것이야. 그가 유언처럼 유선에게 남긴 글이 또한 감동적이야.      


성도에는 뽕나무 800그루와 메마른 땅 열다섯 이랑이 있으므로 제 자손의 생활은 이것으로 여유가 있습니다. 신이 밖에서 임무를 수행할 때에는 특별히 조달해 줄 필요가 없고, 몸에 필요한 옷과 음식은 모두 관부에서 대 주므로 다른 산업을 경영하여 재산을 만들 필요가 조금도 없습니다. 만일 신이 죽었을 대 저희 집안에 남는 비단이 있게 하거나 밖에 다른 재산이 있게 하여 폐하의 은총을 저버리게 하지 않겠습니다.      


불필요한 재물에 욕심이 전혀 없었던 강직한 제갈량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지? 처음 이야기 해 준 여몽이 떠오르기도 하고. 그러니 왕과 백성이 그를 사랑할 수밖에. 제갈량은 유비에게만 물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촉나라의 모든 백성에게 물과 같은 존재였어. 그는 유비를 넘어 모든 백성들과, 물과 물고기의 사귐을 했던 사람이었지. 세상 사람들과 수어지교를 나눈 사람. 이것이 제갈량의 인간적 매력이었어. 이렇게 존경을 받으니 그에 대한 미담(美談)은 후대에 갈수록 부풀려지고 과장되어서 명, 청 시대의 <삼국지연의>에 이르러 엄청난 천재에 기인으로 그려지게 되는 것이지. 그렇게 과장할 필요 없이 제갈량은 그 자체로 기념할 만한 사람임에 틀림없어.


제갈량의 수어지교는 우리나라에도 큰 영향을 끼쳐서 조선의 지식인들도 그를 흠모하고 기렸어. 정조 임금이 창덕궁에 만든 규장각 입구에 가보면 '어수문(魚水門)'이 서있어. 물과 물고기의 문. 임금과 백성의 사이가 물과 물고기의 관계, 즉 수어지교가 되기를 바라면서 세운 문이고 글이지. 그 문을 드나들면서 임금이나 선비들 모두 제갈량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창덕궁 후원에 있는 '어수문'


얘들아, 너희들은 누구에게 물과 같은 존재, 삶의 가치를 북돋아주는 사람이 될 수 있겠니? 주변 사람들과 서로를 완성시켜주는 아름다운 관계로 살아가기를 바란다. 무엇보다 아빠와 너희 사이가 수어지교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 제일 크고. 너희에게도 수어지교의 벗들이 많기를 기원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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