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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미지 Nov 22. 2019

작업기

텅 빈 우주의 리메이크 작업기

5년만에 싱글을 발매했다. 작업기를 정리해두기 전, 책 이야기부터 할까한다.


Intro

'스튜디오 지브리의 현장 스토리(스즈키 도시오 저)'라는 책을 사회초년생 시절 참 좋아했다. 애니메이션 영화 제작에 대한 이야기지만 다른 장르의 공동작업에서도 얼마든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라 그렇다. 이 책의 목차는 아래와 같다. 10여년전 이 책을 읽고 블로그에 리뷰를 올려둔 것에서 목차를 퍼왔다. 책은 집에 없다. 아마도 당시 같이 작업하던 친구에게 주었다가 돌려받지 못했던 것 같은데, 목차만 보고도 공감갔던 내용들이 떠오를 정도다. 사람들은 일이나 인생에 관련한 다양한 명언을 찾지만, 사실 지나치게 함축적인 명언들은 어디에나 끼워맞추기 좋은 점괘 같은 것이다. 보다 구체적인 이야기들 속에서 발견하는 작은 참(truth)같은 것들. 그것이 이 책에 있어 좋았다.


- 목 차

머리말- 몸에 스며들어버린 기억
1. 일은 공과 사를 혼동한다. 맡긴 이상 모두 맡긴다.
2. 함께 일을 하는 이상 교양을 공유하고 싶다.
3. 가장 중요한 것은 감독의 편이 되는 것이다.
4. 소재는 반경 3미터 이내에 얼마든지 널려있다.
5. 모두 함께 언덕에서 굴러떨어지는 것이 영화제작이다.
6. 인간이란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존재다
7. 좋은 작품을 만드는 데에는 작은 회사가 좋다.
후기-작품은 잡담 속에서 탄생한다.

 가장 공감하는 묘사 '모두 함께 언덕에서 굴러떨어지는 것이 영화제작이다. ' 음악제작이다, 회사 프로젝트다, 등등 다양한 변용이 가능하지 않은가? 오래 작업을 쉬었는데, 물론 기획자로서 쉬지 않고 다양한 기획을 하긴 하였으나 내 작업에 손대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다. 과연 나는 어떤 이들과 함께 언덕에서 굴러떨어지게 될 것인가?


1. 5년만의 작업 

2013년 EP <매혹들>의 결과물은 꽤 만족스러웠다. 같이 굴러떨어졌던 멤버 2명과 함께 영혼을 갈아넣었다. 지금 들어도, 후회되는 부분이 없을 정도로 한 트랙 한 트랙 정성을 다했다. 기타 프레이즈 하나도 수십개를 바꿔서 테스트 녹음해가며 하나를 고르는 식이었다. 믹싱도 하나하나 모든 과정을 엔지니어와 함께 밤을 새워가며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여기엔 어떤 딜레이를 어떻게 넣을지,  오토메이션을 이렇게 하고 등등. 물론 석사를 마치고 잠시 쉬는 텀이었기에 가능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일종의 강박적인 작업 스타일을 가질 수 없는 회사원이 된지 5년째다. 그러다보니 어떤 작업도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일을 하면 일에 너무 빠져드는 스타일이라, 일과 사생활의 양립도 잘 되지 않는 편이라서 더욱 그랬다. 이렇게 살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매일 하였지만, 퇴근하고 나면 그저 매일 졸렸다. 일단 액션을 취해야겠다.


2. 어떤 노래로? 

 5년만의 발매에는 과연 어떤 노래가 좋을 것인가? 나의 하드에는 지금도 수백여곡의 신곡 스케치들이 저장되어있다. 길게는 17년전의 데모부터, 짧게는 최근 흥얼거린 것의 녹음본까지. 아마 이 Draft들만 잘 편곡하고 녹음한다면 앞으로 2,30년동안 음원을 낼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많은 곡들을 써두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오래 작업을 쉬었던 나에게 좀 더 의미있고, 작업을 편안하게 할 수 있는 곡이 필요했다. 게다가 완전히 새로운 노래를 하기에는 그간 작업하다 중도에 멈춰놓은 것들이 너무 많아서 괜히 양심에 찔리고 마는 것. 그 아이들의 아우성이 들리는 것만 같아서다. "왜 만들다 마는거야? 이게 몇년째냐고~ 빨리 완성해서 좀 내보내 줘~~~~"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의 지난 두 EP를 듣고 아, 이 사람은 신스팝을 하는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러한 앨범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내가 음악활동을 한 초기(발매된 곡은 없음)에는 밴드사운드가 중심이 되는 곡들로 활동을 했고, 그 후로도 주로 기타를 치며 작곡한다. 그래서 2014년 경 기존 음반에 수록된 곡들을 다시 곡을 처음 써내려갔던 초기의 스타일 (포크에 가까운)로 만들어서 '어쿠스틱 프로젝트'를 내고자 편곡했던 데모들이 있었다. 두 앨범 중 타이틀곡만 모아서 편곡을 해두었기에, 나에게도, 또 듣는 이들에게도 낯설지 않은 곡일 것. 그래서 '텅 빈 우주' 그리고 '낙하하는 모든 것' 의 어쿠스틱 편곡 버전을 내기로 한다.


3. 섭외

앨범 소개글에서도 썼지만, 한창 포크 스타일의 편성으로 공연을 다녔던 때가 바로 이 두리반 시기이다.  2011년의 일이라 이제는 기억 못하는 이들이 더 많겠지만 당시 홍대 언저리에서 음악을 하던 사람들에게는 중요하고도 의미있는 연대 장소가 바로 두리반이었다. 젠트리피케이션에 대응하는 음악의 힘, 그것을 믿는 음악가들의 에너지는 대단했고, 또 실제로 성과도 거둘 수 있었다. 아래와 같은 공연이 있었고, 그때 브로콜리너마저의 라이브를 처음 봤던 것 같다.  그때는 그냥 막연히,  어쩐지 나와 비슷한 스타일로 노래하는 사람이구나 생각했었는데 리메이크할 곡의 정서와 잘 맞을 거란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나에게는 첫 듀엣 작업이기 때문에 단순히 목소리나 창법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정서를 공유할 수 있는 뮤지션이길 바랐고. 그래서 2018년 3월, 협업 제안 연락을 했고, 그 후로 메일로 몇가지 아이디어가 오간 후 4월 웨스트 브릿지의 한 카페에서 브로콜리스튜디오의 이보람 실장, 그리고 덕원, 나 이렇게 만나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브콜도 오랜만에 낼 정규 앨범 작업을 하고 있던 시기이고, 나 역시 급한 것은 아니어서 천천히 의견을 공유하며 작업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다시 수정병이 도져서 나는 당분간 편곡을 다시 해야겠다고(또) 맘먹는다.


4. 수정 본능 

추가 편곡으로 먼 길을 돌아오다. 더 나은 길이 없을까? 안고치면 불안해. 4월 미팅 이후 편곡자와 함께 몇가지 시도들을 하다가 실패한 이야기.

- 이 노래는 처음(10여년전) 포크folk 스타일로 기타를 치며 한 번에 쓰여진 노래다. 하지만 첫 EP 은유화를 제작시 음반의 전체적 soundmap 을 구상할때 내가 좋아하는 영역인 folk 와 electronica 의 접점을 찾고자 하였기 때문에 여러 레퍼런스들을 가지고 편곡을 거쳐 오리지널 버전을 만들게 됐다. 하지만 이번 듀엣 편곡은 이렇다할 레퍼런스를 안잡고 그간 라이브 공연을 위해 만든 수많은 버전(밴드 편성, 원기타, 투기타, with 퍼커션이나 젬베 등등) 중 2014년 유재하동문 연말 공연을 위해 만든 가장 미니멀한 구성의 것을 디벨롭 해보기로 하였다. 그러다보니 동료인 기타리스트이자 편곡자 zigm(정상욱)와 많은 고민을 하게 됐다. 여기서부터 거대한 흐름의 작업 딜레이라는 구렁텅이에 빠지기 시작하는데...(후략) 뭐랄까 본 작업기의 Intro에서 언급하였듯 작업이란 것은 함께 하는 사람들과 다같이 언덕에서 굴러떨어지는 일이긴한데, 여러번 목적지를 찾지 못하는 굴러떨어짐이 있었다고 해두자. 물론 좋은 경우의 수도 나왔지만, 최종적으로 그 방향으론 가지 않았다.

요약해보자면, 가장 큰 고민은 리듬섹션의 추가 이슈였고 실제로 리얼드럼부터 핸드쉐이커, 더 나아가서는 주파수로 만든 소스를 입혀보며 모든 소스를 최소화하는 극단적 미니멀리즘 버전까지 여러 실험을 거쳤던 것. 하지만 그 지난한 과정을 통해서 다시 이 멜로디와 스토리에는 소소한 구성의 자연스러운 라이브용 셋이 낫구나라고 깨닫게 됐다. (물론 더 나은 다른 방법이 있을 거라곤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었지만 구현하지 못하였다)

그 사이 덕원은 개인 연습을 녹음해 이메일로 공유하였고, 각자의 파트를 어떻게 나누면 좋을지를 각자의 녹음 트랙을 기준으로 고민하였다. 그렇게 바쁜 3인(편곡자 포함)의 5~12월이 지나간다. 그리고 각자의 메인 프로젝트로 바빴던 1,2월이 지난 뒤 4월 드디어 보컬 녹음을 하게 된다. 결과적으로는 그간 작업해온 곡 중 가장 트랙수가 적을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트랙 수가 적은 MR에 보컬 녹음을 하고, 믹싱을 하는 경험이 적었기 때문에 그 후로도 어려움을 많이 겪게 된다. 또한 믹싱 과정에서는 이 기간 작업을 많이 했던 덕원의 의견이 도움이 많이 되었다.



5. 녹음, 믹스, 마스터 


지난 10여년간 작업을 해오며 시간제(프로당 금액) 스튜디오를 많이 사용한 적은 거의 없다. 쓰더라도 비중이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믹스도 지인과 같이 직접 한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DIY의 끝을 달렸는데, 그러다보면 어딘가의 지하실에서 바깥 소음에 신경써가며 방금 받은 녹음에 빗소리가 섞인 것은 아닌지 모니터해보는 그런 환경에서 작업을 하게 된다. (어떨땐 쓰고 싶은 소리도 있지만 사실 좋은 소스의 관점에서 이러한 노이즈 개입이 이후 후반작업을 고려할땐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면서 점점 제작자 혹은 기획자로서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 조금이라도 좋은 환경에서 함께 일할 수 있어야겠다고 느껴왔기에. 이번 작업은 드디어 녹음, 믹스와 마스터를 외부 스튜디오에 맡겼고 나로서는 장단점이 있었던 작업이었다. 장점이라면 좀 더 나은 환경과 장비들, 단점이라면 다양한 트라이를 해보기에는 시간에 구애받게 되는 환경, 지인이 아닌 비지니스 관계의 '초면' 엔지니어 분들만 있는 곳에서는 아무래도 내 방처럼 편할 수는 없으니 신경이 쓰일 수 있다는 점? 물론 작업 속도는 훨씬 빠르다. 아무튼 그렇게 찾았던 녹음실에는 고양이가 있어서 행복했고, 나에겐 정서적으로도 도움이 되었다(?) ㅎㅎ

6. 부랴부랴 행정 

사실 가장 힘든 부분이 이 행정처리일 것이다. 행정인력이 별도로 없는 개인레이블이라면 이것 역시 직접 아티스트가 핸들링해야한다. 그.런.데 5년만에 해보니 생각보다 할 것이 많았다. 특히 해외 유통에 관련된 것들은 매뉴얼이 30페이지에 이르렀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릴리즈 이후에도 여러 종류의 예기치 못한 문제들이 발생해 많은 에너지를 요했다는 슬픈 사실.


7. 비쥬얼 

귀 기울여야 들리고, 자세히 보아야 보이는 넓은 풍경. 광대함 속에서 찾는 마이크로함을 생각하며 만들었다. 이렇게 텍스트로 풀어도 쉽지 않은 묘사인데, 어떻게 적절한 이미지를 만들 수 있을까? 곡을 편곡할때도 나는 이를 일종의 landscape 라고 생각하고 작업하는 편이라, 처음부터 지향하는 그림은 있었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구현은 또 다른 문제다.

지난 앨범 ‘매혹들’의 사진을 맡아주신 다큐멘터리 사진가 이상엽 선생님이 이번에도 쿨하게 기존 작업 사진 중 한 컷을 쓸 수 있게 해주셨다. 다시금 감사드린다. 이 노래가 갖고 있는 지평선의 느낌, scape와 맞닿아있는 사진이라 꼭 쓰고 싶었고, 결과적으로는 마음에 쏙 드는 앨범 아트가 되었다.


Outro

오랜만의 작업에 저에게 여러모로 부족함이 많았던 것은 팩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함께해준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우당탕탕 한 것 같은데도 시간이 꽤 오래 걸렸네요. 다음 작업은 또 어떤 모험이 펼쳐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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