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딸들에게
한국에서 있을 때 부인님께서 다니시던 외국계 회사에 프랑스인 부사장님이 왔었다. 30대 중반의 젊고 잘생기고 유머까지 넘치는 부사장님이었는데, 유부남이라 부인과 함께 한국으로 넘어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프랑스 부부가 한국으로 넘어오면서 있었던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들었다. 이 '외딴 오지'인 한국으로 넘어오면서 이 부사장님은 승진과 꽤 높은 연봉을 받게 되었고, 부인은 남편과 협상하여 남편에게서 프랑스에서 받던 연봉을 받으면서 한국에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소리인가 했지만, 부인 입장에서 잘 이어가던 자신의 경력을 멈추고 먼 이국 땅에 가야 하는 일이니 경제적인 보상을 받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가끔 부사장님이 "한국 주부들은 굉장히 프로 같은데, 자기 부인은 집에서 집안일도 안 하고 여유롭게 지낸다"며 농담 섞인 불평을 늘어놓았다고 한다.
'부부 간에도 경제적으로 독립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면 역시 유럽 사람이라 부부 간에도 굉장히 차갑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내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아무리 가족 간이라도 정말 평등하려면 경제적 능력을 갖춰야 한다. 내가 첫 회사를 그만 둘 무렵 부모님과 심하게 다툰 적이 있다. 부모님께서는 대학교 졸업도 시키고 취업도 하니 이제 자식 하나 다 키운 것 같았는데, (36년 한 회사에서 근무하신) 부모님이 보시기에 얼마 다니지도 않았는데 그걸 못 참고 그만두겠다고 하니 걱정도 많이 되셨을 거다. 하지만 결국 내 뜻대로 회사를 그만뒀는데, 화가 나신 아버지가 내린 벌이 매달 대신 내주시던 자취방 월세를 끊으신 거였다. 물론 대학교 들어가면서 자기 손으로 월세도 내고, 학비까지 마련하는 사람도 많고, 그때까지 내주셨던 월세가 당연하다는 이야기는 절대로 아니다. 아직도 평생 두 자식 위해 평생을 바친 부모님 희생을 잘 알고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이 당시 이 조치는 마치 북한이 미사일 쏘면, 우리 정부가 하는 경제적 제재 조치 같았다. 부모 자식 간에도 이렇다.
아무리 가족이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더라도,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건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그걸 바탕으로 강제력을 행사하고 싶다는 욕망을 느끼게 만들 수밖에 없다. 그리고 대체로 경제력을 가진 사람이 뭔가 가정 내 의사 결정을 할 때 영향력도 가장 크다. "내가 돈 벌어 오니까 내 마음대로 할 거다"라고 말하지 않더라도, 가정 내의 권력관계는 그렇게 흘러간다. 나는 그 당시 잠깐 경제적으로 빈곤했지만, 그 이후 다시 일을 시작하면서 경제적으로 독립했고, 그 덕분에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
한국에서 자신의 경력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정말 끔찍할 정도의 의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주위 사례를 통해서 잘 느끼고 있다.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자식이 아프다고 연락 오면 대게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는 몫은 부인의 몫이다. 그리고 부모님에게 양육을 부탁하더라도, 똑같이 죄인인데 시댁 부모님과 친정 부모님에게 모두 죄송한 것도 대게 부인의 몫이다. 너도 부모, 나도 부모인데 왜 남편은 자기가 육아를 돕는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고. 만약 같은 회사를 다니면 그래도 남편이 회사를 계속 다니는 게 낫지 않냐며 퇴사 종용까지 받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한다. 남편이 회식도 회사일의 연장선이라며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을 때, 지친 몸을 이끌고 혼자 애를 보는 날이면 얼마나 피곤할까. 내가 생각해도 끔찍하고,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여성들을 지지한다. 나라도 낳기 싫다.
심지어 대체로 한국에서는 많이 바뀌고는 있지만 여전히 남자보다 능력 좋은 여성을 꺼리는 분위기가 아닌가. 이게 바꿔서 생각하면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인지 알 수가 있다. 이런 부모가 있다고 상상해보자. 부모는 그럭저럭 회사 생활을 하고 중간만 가자고 생각하면서 사는데, 자식은 학교에서 시험만 보면 1등을 해서 온다. 그래서 부모가 자녀에게 자격지심을 느끼며 이렇게 말한다. "아빠는 회사에서 이것밖에 못 벌어오는데, 자식이라는 놈이 학교에서 1등을 맨날 해서 오다니!" 얼마나 이상한가? 그런데 놀랍게도 부부 사이에는 이런 일이 벌어진다. 이걸 보면 부부 사이가 친구 사이보다 못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럼에도 나는 꼭 여성이 자신의 경력을 포기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가정 주부가 된다는 것이 '열등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주부로 사는 것에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이고. 하지만 나는 두 사람이 경제적으로 평등한 관계에 있을 때, 그 관계가 더 건강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여성이 경제적 독립을 한다는 것이 부부가 경제적으로 경쟁하는 것은 아니라고 선을 긋고 싶다. 물론 우리 부부는 장난 삼아, 한 달에 돈을 더 많이 버는 사람을 "가장"이라고 부른다. 내 수입이 고정적이지 않은 편이라 '가장'이 자주 바뀐다. 이런 장난은 어느 정도는 조금 더 벌기 위한 동기부여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부부 두 사람 모두의 경제적 독립이 정말로 중요한 이유는, 이 경제적 독립이 배우자가 새로운 도전의 순간에 섰을 때 진심으로 지원해줄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부부가 결혼생활에서 겪는 갈등 중에 많은 부분은 경제적인 문제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외벌이 가정에서 애가 둘이 있는데, 경제 활동을 전담하고 있는 사람이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다며 회사를 그만둔다고 한다면? 외벌이 가정에서 갑자기 퇴사 권고를 받는다면? 분명히 그 가정은 짧게나마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말이 곱게 나오기가 힘들다. 그런데 두 사람이 경제 활동을 한다면 한 사람이 잠깐 일을 그만두더라도 아껴서 쓴다면 몇 개월은 모아둔 돈과 한 사람의 소득으로 충분히 지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배우자의 새로운 도전이나 이직을 지원하고, 내가 새로운 도전이나 이직을 하고 싶을 때 눈치 보지 않고 배우자에게 지원을 요청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이게 정말 발전적인 부부 관계라는 생각이 든다. 누구 한 명이 다른 사람을 위해 경력을 희생하지 않고, 서로 함께 하기 때문에 더 큰 꿈을 꾸고 도전할 수 있는 그런 관계 말이다. 그리고 "내가 가족들 먹여 살리려고 더러운 꼴 보면서 회사 계속 다니는데, 이 정도도 마음대로 못하냐"며 성질부리는 '가장'의 출현도 막을 수 있을 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