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중의 첫걸음
사람들과 부대껴서 지내다 보면 가끔은 정면으로 마주 앉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어느 해엔가 과천국립현대미술관에 간 적이 있다. 미술에 그다지 조예가 깊지 않기 때문에 마음에 와서 부딪히는 작품을 만나는 것은 참 어렵다. 그런데 그날은 신기하게도 내가 좋아하는 조소 작품전이 열리고 있었다. 그중에 긴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은 두 사람을 형상화한 작품이 있었는데 서로 정면을 보고 앉은 것이 아니라 한 명은 오른쪽 끝에 한 명은 왼쪽 끝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제목은 “가끔은 마주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작품을 본 순간 마음속 깊은 곳까지 그 작품을 만들었을 작가의 마음이 절절히 스며들었다. 그 상황이 선명하게 머릿속에 그려졌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순간순간 친구, 직장 동료들과 마주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하물며 내 인생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족들하고조차도 가끔은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경험에서 알고 있듯이 ‘거리두기’는 나쁜 것만은 아니다. 내가 살아가는데 작은 ‘여유’를 주고, 그 여유가 ‘넓은 마음’으로 이끈다. 솔직히 항상 마주 앉아있을 때는 정면만 바라보지만 빗겨 앉게 되면 옆모습, 위, 아래 특히 마주 앉은 대상과 나와의 거리가 충분히 확보되어 우리를 둘러싼 공기의 흐름조차도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럴 때 나는 나로 있으면서 함께 하는 상대를 여러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나를 분노하게 했던 것들로부터 천천히 해방되는 것을 느낀다. ‘나이’라는 물리적인 시간의 거리, ‘나이’와 함께 갖게 된 수많은 공간의 경험들로 인해 자연스럽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때로는 그저 일어서서 계속 나아가기만 해도 용기 있고 대단한 일 같아.” 찰리 맥커시의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의 한 구절이다. 바로 2년 전만 해도 그 뒤에 어떤 목표를 가지고 무언가를 도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저 일어서서’는 나와 너, 우리가 어우러져 살아가는 경이로운 작은 파동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