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은 짜증으로 들리고
배려는 비꼬임으로 느껴진다.
문장은 그대로인데
온도만 달라졌다.
따뜻하게 출발한 문장은
어느덧 차갑게 도착하고,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오역(誤譯)이 된다.
걱정은 짜증으로 들리고, 배려는 비꼬임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말이 거칠어진 것도 아니고 문장이 달라진 것도 아닌데, 어느 순간부터 같은 말이 전혀 다른 의미로 도착한다. 그 차이는 말의 내용이 아니라, 그 말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가짐이나 상황에 따라 다르게 들릴 수 있다.
"요즘 너무 늦게 자는 거 아니야?"라는 말은 분명 걱정에서 나온 말이다. 하지만 내가 지쳐 있을 때, 예민해져 있을 때 그 문장은 걱정이 아니라 잔소리로 번역되기도 한다. "힘들면 안 해도 돼."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상대는 배려의 마음으로 건넨 말이지만, 듣는 쪽의 귀에는 '어차피 너 못 할 거잖아'라는 포기나 무시처럼 들리기도 한다. "어디야?"라는 짧은 질문도 마찬가지다. 보고 싶어서, 궁금해서 묻는 말인데, 퇴근 후 차가 밀려 짜증이 난 상태에서는 '빨리빨리 안 오고 뭐 해'라는 감시처럼 느껴진다. 도움을 주려는 조언은 평가로 들리고, 웃자고 던진 농담은 비아냥으로 들린다. 말은 그대로인데 해석만 바뀐다.
때로는 말조차 필요 없다. 답장이 늦는 침묵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상대의 마음을 마음대로 번역한다. 바빴을 수도 있고, 잠들었을 수도 있는데, 그 사이 우리는 이미 '관심이 식은 것 같다', '나보다 중요한 게 생겼나 보다' 같은 이야기를 스스로 써 내려간다. 말이 없는데도 오역은 점점 소설이 되어간다.
생각해 보면 오역은 관계가 틀어질 때 생기는 게 아니라, 마음이 먼저 식었을 때 시작된다. 서운함이 생기고, 피로가 쌓이고, 상대를 이해하려 하기보다 방어하려는 마음이 커질 때, 우리는 같은 문장을 들어도 전혀 다른 자막을 가져다 붙인다. 그때부터 상대의 말은 의미가 아니라 감정으로 해석된다.
사실 우리는 자주 싸우는 게 아니라, 서로를 잘못 번역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상대는 여전히 같은 언어를 쓰고 있는데, 우리는 이미 각자의 사전을 바꿔버린 채 대화를 이어가고 있다. 그렇게 걱정은 짜증이 되고, 배려는 비꼬임이 되고, 결국 우리는 서로에게 조금씩, 조용히 오역이 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