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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 YI NA Nov 09. 2022

행복한 라짜로 Lazzaro felice (2018)

비평


  선과 악, 권력과 무력(無力)은 어쩔 수 없이 대부분의 이야기에 대립적 구조로 등장합니다. 영화 조커에서도 조커가 이 세상의 부조리에 대항하는 무력한 자로 그려지고, 그 유명한 영화 기생충에서도 핵심 소재가 부와 권력입니다.  '행복한 라짜로' 에서도 선과 악, 권력과 무력이 영화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중심축이라 할 수 있는데요. 저는 사실 이 영화를 작년 여름, 이대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처음 보고 매력적인 영화라 느끼지 못 했습니다. 영화에 대한 애정이 강한 사람이고, 늘 감정적 동요와 감동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지만 이 영화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라짜로란 인물이 너무나도 무력(無力)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조커나 기생충이란 영화에 그토록 평점을 높게 주고, 매력을 느낀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을 그들 각자 가지고 있는 무력(武力)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커는 그 무력의 형태가 광기이자 코미디였고, 기생충의 가족들은 위장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무력의 형태로 있는 자들에게 복수하려 했고 대항했습니다. 하지만 라짜로는 그와는 반대로 아무런 대항도 하지 않았고, 인간이라면 보편적으로 권력구조에서 느낄만한 수치심도 없습니다. 저는 항상 뜨거운 사람이기에 라짜로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건대, 라짜로가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면 이 영화는 성립하지 않았을 것 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보니, 어쩌면 감독은 의도적으로 다른 인물들의 매력적인 무력 대신 신성함을 택한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신성함은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어떻게 영화를 성립하게 하는지에 대해 물음을 가져야 겠지요.


 라짜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 영화는 1부, 2부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1부는 인비올라타(시골), 2부는 도시에서의 생활입니다. 1부에서 라짜로는 후작 부인의 아들 탄크레디와 우정을 맺습니다. 시골에서 벗어나고 싶은 탄크레디는 그를 이용합니다. 납치 당한 것처럼 일을 꾸미고, 그 단순한 장난이 커져서 경찰이라는 외부인들을 불러 마을 사람들은 시골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즉, 노예 생활에서 해방 됩니다. 이 사건이 1부의 가장 중심된 사건입니다. 저는 여기서 탄크레디가 늘 안고 다니는 반려견에 시선이 갔습니다. 작은 체구에 똘망이는 눈망울이 탄크레디의 연약함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듯 했습니다. 그리고 이 반려견에 대비되는 존재가 늑대라 생각했습니다. 영화 초반부부터 늑대는 마을 사람들에게 물리쳐야 하는, 위협적인 존재로 그려집니다. 닭을 늑대가 모두 잡아 먹기전에 닭장에 집어넣어야 한다, 늑대가 오려는 소리가 들린다 등등..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늑대는 라짜로에 은유되는 존재로 그려집니다.


 탄크레디를 찾으러 가다가 절벽에 떨어진 장면에서 늑대와 성자 이야기가 나오죠. 성자가 쓰러져있으나 선한 냄새를 맡고 자신이 굶주림에도 인간을 잡아먹지 않는 늑대. 자신을 계속 부려먹고, 무시하는 사람들 틈에서도 선함, 순수함을 잃지 않는 라짜로의 신성함과 유사하지 않습니까. 일례로 탄크레디가 반려견을 안고 사람들에게 왔을 때, 그들은 탄크레디를 경계하지만 라짜로만이 반려견에게 간식을 주려고 하며 배려를 배풉니다. 권력층은 탄크레디의 반려견처럼 누군가 안아주지 않으면 스스로 걷기 힘든 나약함의 상징인 반면에, 순수, 선함을 늘 잃지 않는 늑대의 능동적인 강함을 대비시켜 보여주는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권력이란, 계급구조에 의존하고 있기에 오히려 나약한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1부에서 보여지는 라짜로는 그 어떤 외부적인 요인에도 불변하는 절대적 선을 가진 자라 할 수 있겠습니다.


 당신은 비싸게 주고 산 케이크를 착취한 그들에게 주고 올 수 있습니까.


2부에선 라짜로가 다른 보통의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절벽에 떨어지고도 부활했다는 것, 인비올라타에서 도시로 가는 그 먼길을 홀로 걸어갔다는 것, 무엇보다 그 혼자 늙지 않았다는 것. 안토니아가 늙지 않은 그를 보고 신성시 여기며 절을 한 장면은 이 영화를 본 사람은 대부분 잊지 못할 거라 생각합니다. 특히 2부에서 지금까지 계속 뇌리에 강하게 남아있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건 안토니아가 가짜 점심 약속에 초대 받고도, 자신을 착취했던 탄크레디 집안 사람에게 50유로나 주고 산 케이크를 전부 주고 오는 장면이었습니다. 그 장면이 저에게는 대단히 판타지적이고 충격적으로 느껴졌습니다. 대체 누가, 자신을 오랫동안 착취해왔고, 현재 가난한 상태에서 저 귀한 케이크를 흔쾌히 주고 올 수 있을까. 라짜로의 선함은 그의 당연한 특성으로 그려지지만, 안토니아의 그 선한 행동이 오히려 충격이 컸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값비싼 재화가 없이도 행복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고장난 차를 몸소 이끌고 그들의 거처로 가는 장면은 정말로 인정있고 행복해보였습니다. 그것이 그들이 라짜로의 형상을 띄고 있는 모습으로 보였고, 감독은 거기서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인가 보여주는 듯 했습니다. 거기에다가 무언가 형언할 수 없는 신비함으로 성당의 음악 소리가 차를 끄는 그들위에 존재하는 장면은 아름답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감독은 라짜로의 선함, 순수함의 힘을 아름답게 표현하려 한 것이 아닐까요.


 문제는 마지막 장면

아름답게 끝날 것 같던 이 영화는 마지막 장면에서 갑작스런 긴장감을 주고 끝이 납니다. 저는 마지막 결말이 이 영화를 살렸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아까와 같은 결말로 끝이 났다면 이 영화는 '선은 아름답다'는 진부한 클리셰를 가진 영화가 되고 맙니다. 라짜로는 은행에 들어섭니다. 은행은 철저히 정확하고 타산적인 현대시대를 의미합니다. 저는 이 장면이 묘하다고 느꼈습니다. 은행이란 공간엔 낡은 옷을 입은 우화적인 인물인 라짜로가 있다는 것, 그곳에 수많은 인간들이 라짜로의 새총을 진짜 총으로 오인지하고 폭력을 남발하는 장면, 이 장면들 속에 은행과 라짜로, 새총과 총이 대립하는 것이 독특했습니다. 그리고 은행에서 죽어가는 라짜로, 그리고 도시를 방황하는 늑대가 보여지면서 영화가 끝이 납니다. 라짜로를 향한 사람들의 무시무시한 시선, 마녀사냥으로 인한 무차별한 폭력은 이러한 물음을 남깁니다. 선과 악, 권력의 구조는 옛 시대보다 완화되었으나, 인간 마음 속에 존재하는 폭력의 심각성과 의구심은 그 어느 때보다 중대해지지 않았나. 그러므로 지금의 우리는 정말로 행복한가. 도시를 방황하는 신성한 늑대는 성자를 끊임없이 찾으며 방황하고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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