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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 YI NA Jun 25. 2024

이반일리치의 죽음

비평



 어느 날,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시라는 판결을 받는다. 죽음을 맞이하는 날, 그는 가족들을 떠나보내고 제자들과 있기를 원한다.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의 시간을 오로지 철학적 사색에 바치고 싶었던 것이다. 제자들이 슬픔에 잠겨 절망적인 표정을 짓고 있는 것과 다르게 소크라테스는 죽는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는 죽음 앞에서 겁이 많아져서 불안에 떨며 남은 생에 집착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철학자의 면모가 아니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렇기에 몸소 자신의 신념을 실천해 보이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신념은 다분히 마조히즘적이다. 인간은 결국 육체라는 기만과 욕망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죽음 그 자체를 사유하기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육체를 걸고 얻어내는 철학적 명예에 지나지 않는다. 죽음이란, 인간에게 있어서 영원한 비밀인 것이다. 문학은 그 영원한 비밀 앞에서 비굴하게 탐색한다. 철학적 명예를 위해 죽는 기개를 발휘하지는 못 하지만, 오히려 내밀하게 그 비밀에 대해 파헤친다.

톨스토이는 젊은 시절부터 대단히 건강하고 힘이 좋은 청년이었다. 그는 신체적으로 생명력이 넘칠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예민해서 내면의 거센 감정의 고조를 두려워했다. 그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에 거부감을 나타내었고 (특히 여자), 그 욕망을 극복해야만이 신의 깨달음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성욕에 대해 정복했을지라도 죽음이란, 동물적인 욕구보다 훨씬 근원적인 운명이기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까지는 극복하기 힘들어했던 것 같다. 그렇기에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그가 인생의 무상함을 어떻게든 정복해보고 싶은 욕망이 담긴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작품은 액자형식의 구도를 취하고 있다. 첫 도입부는 이반 일리치가 죽은 뒤에 그의 죽음에 대해 사람들이 보이는 세속적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 그들이 이반 일리치의 사망 소식을 듣고 생각한 것은 그로 인해 생길 자리 이동과 승진이 전부는 아니었다. 가까운 사람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누구나 그렇듯 그들 역시 속으로 안도감을 느꼈다. '죽은 건 내가 아니라 바로 그 사람이야.' "

톨스토이는 이 같은 사람들의 태도를 통해 물질과 욕망이 채워지면 그만인, 1차원적 육욕만을 갈망하는 인간상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반 일리치의 아내도 남편이 죽은 뒤에 금전적인 부분에만 집착한다.

"슬픔 때문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못 한다고 하는 건 위선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오히려 그 사람을 위해 온갖 일에 신경 쓰다 보면 슬픔을 조금은 잊을 수 있거든요. 위로를 받는 것까진 아니라 해도 말이에요."

톨스토이 작품의 매력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의 위선을 도덕가적인 시선에서 꾸짖듯이 보여주는 듯하면서도 사실, 죽음이 삶의 이면에 필연적으로 존재하듯이 물질을 향한 욕망은 살아있는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는 것임을 담담히 드러낸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에게 실은 삶의 진정한 비극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위선을 끌어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세계의 진리에 있음이 말해진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과 대비되는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게라심'이다. 그는 이반 일리치 집안의 하인인데, 이반 일리치가 병치례를 하는 동안 헌신적으로 그를 수발들었던 인물이다. 모두가 죽음 앞에서 위선적인 허례허식을 치를 때, 게라 심은 이렇게 말한다.

" 죽음이란 다 하나님의 뜻인걸요. 우리 모두 언젠가는 가야 할 길이지요."

그에게는 그 어떤 이기심이나 죽음에 대한 슬픔과 같은 인간적인 감정이 보이지 않는다. 그는 이 작품에서 톨스토이가 창조해 낸 가장 환상에 가까운 인물인 것이다. 그는 아무런 불평 없이 밤새 이반 일리치의 다리를 들고 있기도 했고 용변을 보다가 쓰러진 이반 일리치를 보고 놀라움이나 수치심 따위는 전혀 없이 그를 돌봐주었다.
 이반 일리치의 삶이 병에 걸리기 전과 후로 나뉘기도 하지만, 사실 게라심의 등장 전과 후로도 나뉜다고 볼 수 있다. 먼저 불치병에 걸리기 전에 그는 사실 가족 중 누구보다도 명예지향적인 인물이었다. 아내나 자식들은 가족의 구성원에 불과할 뿐이고 그는 오로지 일에만 몰두해서 높은 자리까지 올라가는 데에만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높은 직급의 있는 사람들과 카드놀이를 하는 것이 삶의 유일한 쾌락이었다. 그는 '쾌'에 해당하는 것은 어떻게든 모두 자신의 소유물로 만들고 싶어 했고, 불쾌감을 가져다주는 것에는 철저히 무시하는 삶을 살았다. 한마디로 그는 '무시의 대가'였다.

"가령, 어떤 사람이 그를 찾아와 뭔가를 알고 싶어 한다고 치자. 이반 일리치는 공무를 떠난 개인으로서는 그 사람과 어떤 관계도 맺지 않았다. (...) 이반 일리치는 이처럼 공적 업무와 사생활을 뒤섞지 않고 엄격하게 구분하는 능력이 탁월했으며 오랜 경험과 타고난 재능 덕에 가끔씩은 마치 한 분야의 거장처럼 사적 관계와 공적 관계를 일부러 뒤섞기까지 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필요하다면 언제든 다시 공적인 관계를 구분해 내고 사적인 관계를 버릴 수 있는 능력이 스스로에게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삶이라는 것에 대해 돈과 명예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라 믿으며, 거의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인생의 반격이 시작된다.

"가족 모두 건강했다. 이반 일리치가 이따금 입 안에 이상한 맛이 느껴지고 왼쪽 옆구리가 어쩐지 거북하다고 하긴 했지만,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 거북한 느낌이 점점 심해지더니 딱히 통증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어도 옆구리가 묵직해지고 따라서 기분도 가라앉았다. 이반 일리치의 상태가 나날이 나빠지면서 급기야 골로빈 가족 사이에 자리 잡은 화목하고 경쾌하고 품위 있는 삶이 망가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부부가 다투는 일이 잦아지는가 싶더니 얼마 안 가 경쾌하고 화목한 분위기가 사라지고 간신히 품위만 유지하는 형편이 되었다. 예전과 같은 장면들이 걸핏하면 반복되었다. 남편과 아내가 폭발하지 않고 만날 수 있는 작은 섬들이 또다시 거의 사라져 갔다."

 뜻하지 않게 신장 쪽이 아프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저명한 의사는 다 찾아다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어떤 의사도 그에게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 이반 일리치가 판사로써 일할 때, 원리 원칙 대로만 처리하려 했던 것처럼, 그 누구도 그에게 정확한 답을 주거나 진심 어린 위로를 주지 않는다. 이것은 참 이상하다. 분명 훌륭한 대학을 나오고 똑똑한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병 명과 명확한 치료 방법을 찾아낼 수가 없다는 것이... 작가는 이 지점에서 삶의 불가해함을 서서히 드러낸다. 이반 일리치는 돈과 자신의 직위로도 해결할 수 없는 이 소름 끼치는 불가해함에 직면하면서 극도로 외로움을 느낀다. 여기서 우린 알 수 있다. 그 어떤 인위적인 힘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삶의 불가해함 앞에서 느끼는 감정에 다른 어느 누구도 다가와서 위로해 줄 수 없고 온전히 혼자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이미 이때부터 이반 일리치의 진정한 죽음은 시작된 것이다. 사회에서 인정받았던 것들로부터의 박탈, 그리고 가족으로부터의 소외감. 그러나 그런 그에게 유일한 구세주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게라심'이라는 인물이다. 이반 일리치는 가족(특히 아내)을 혐오하게 되면서 반대로 게라심에게 위안을 얻고 사랑하게 된다. 이는 말년에 톨스토이가 어느 순간, 가족도 명예도 모든 것이 의미가 없어진 느낌이 드는 공허한 순간이 찾아왔다고 말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게라 심은 세속적인 것을 초월한 자연 그 자체의 인간으로 묘사된다. 그는 순수하고 무구하다. 이반 일리치는 과거에 가식적이고 공적으로만 대해야 했던 인간관계에서 탈피해, 자신을 인간 그 자체로서 대우해 주는 그의 순수함에 무한한 감동을 느낀다. 그리고 여기서 느낄 수 있는 것은 그가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비우호적 태도를 지녔다는 것과 오로지 신에게 절대적 답이 존재한다는 강경한 윤리적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이는 마치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서 인간적 사랑의 아름다움을 그려냈던 예술가에서 구도자의 모습으로 전환하고 싶은 그의 욕망이 느껴지는 것이다.   

마지막에 그는 결국 숨을 거둔다.

"다 끝났습니다!" 누군가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반 일리치는 이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끝난 건 죽음이야. 이제 죽음은 존재하지 않아.'
이반 일리치는 숨을 훅 들이마시다가 그대로 멈추더니 몸을 축 늘어뜨리며 숨을 거두었다.

인간이 죽음으로써 모든 외적인 힘은 중단된다. 그리고 외부 세계의 힘이 죽어버린 시체를 압도한다. 이제 죽음은 곧 자기 고뇌에서 타인의 전시물로 전락하게 된다. 부검을 진행하게 된다면 이제야 그의 신장에 대한 결백한 비밀이 드러날 것이고, 사람들은 그의 시체에 의례적인 조문 인사를 하러 올 것이다. 다시 이 작품의 첫 페이지로 돌아가서 조문을 치르기 귀찮아는 사람들과 죽은 뒤에 그의 연금에만 관심 있는 아내, 또 그의 자리에 누가 올라갈 것인가에 대한 시시콜콜한 잡담이 시작되는 부분으로 돌아가도 이상하지 않다. 여기서 바로 삶의 비밀을 들여다볼 수 있다. 이반일리치가 자신의 죽음에 대해 고뇌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유일하게 진실된 내면적 삶을 이루는 순간이 꿈과 같은 예술적 지점이라면, 그 고귀한 순간은 금세 사라져 버리고 우리는 어느 순간 지극히 단순하고 사소한 삶으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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