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선에 대한 욕망이 전혀 없다는 것은, 오히려 이치에 어긋나고 부자연스러운 반응이므로, 이상할 뿐만 아니라 심오한 의미에서 볼 때 ‘잘못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고. 덧붙여 알랭 드 보통은 외도의 가능성을 전혀 즐길 줄 모른다면 상상력의 결핍을 의미하는 것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또 그는 말한다. 성욕이란 게 없었다면 우리는 예술적 감각에 대해 훨씬 무뎌질 것이라고. 예를 들어 소설 ‘롤리타’ 같은 작품이 주목받을 수 있는 것도 우리 안에 있는 감춰진 욕망 때문일 것이다.
한 개인의 욕망은 감히 책 속의 구절로 단정될 수 없다. 그렇지만 나는 오토가 저지르는 일탈이 위와 같은 맥락에서 어느 정도는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토는 글을 쓰는 각본가이고, 섹스와 같은 교감으로 이야기를 창조해내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영화 서사의 중심축을 이루는 것이 오토가 지어낸 ‘야마가 이야기’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야마가의 이야기를 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토가 죽은 뒤에 가후쿠의 이야기를 쫒아야 한다.
지금부터 내가 쓰는 글은 끝내 자신에 대해 말하지 못하고 떠나간 그녀를 대신한 가후쿠를 향한 고백이 될지도 모르겠다.
드라이브 마이 카의 느낌을 표현해보았습니다.
누군가가 지어낸 이야기는 자신을 알아달라는 시그널이 될 수 있다.
영화는 야마가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야마가는 오토가 지어낸 이야기 속 주인공의 첫사랑 이름이다. 그녀는 때때로 야마가의 방에 몰래 들어간다. 그에 대한 모든 것이 알고 싶어서. 그리고 불현듯 보청기를 꼈을 때처럼 강조된 고요함이 그 방 안을 울리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야먀가의 침대에는 눕지만 수음하고 싶은 충동은 누른다. 그 이유는 그녀 안엔 규칙이 있기 때문이다. 해도 되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 여기까지가 오토가 침대 위에서 읊었던 이야기고, 이후 둘은 출근 드라이브를 하며 가후쿠가 이어서 이야기를 지어낸다. 그녀는 야마가 책상 서랍에 사용하지 않은 탐폰을 두고 나오고 야마가의 연필 한 자루를 가지고 오고 이런 식으로 반복되면서 둘은 교감하는 것이라 느낀다는 이야기를 한다. 이때까지는 오토가 자신의 비밀을 숨겨야 한다고 믿는 듯 보인다. 수음을 하지 않는다는 것과 도덕적인 구분을 짓는 것은.
그러나 비밀은 목격되고 만다. 나리타 공항에 간 가 후쿠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 확신한 것인지 오토는 집에 다카츠키라는 연극배우 후배를 데리고 와서 섹스를 한다. 그러나 결항이 되어 버려 다시 집에 돌아간 가후쿠는 섹스에 몰입해있는 오토를 보고 그대로 지나쳐 조용히 나온다. 그리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모른 척하며 오토와 영상 통화를 한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운전을 하다가 가후쿠에게 접촉 사고가 난다. 이로인해 병원 진찰을 받다가 녹내장임을 발견한다. 여기서 의사의 발언이 의미 심장하게 들린다.
‘녹내장은 시신경의 장애로 시야가 점점 좁아지는 병입니다. 한쪽 눈이 보조 역할을 해 쉽게 병을 인지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일상생활에 영향이 적은 편입니다. 그래서 알아챌 때는 실명 직전인 경우가 많아요. 빨리 알게 되어 불행 중 다행입니다.’
녹내장의 발견은 아내의 비밀을 그대로 지나쳐 버린 가후쿠에게 첫 번째로 보내는 경고 메시지처럼 보인다. 한쪽 눈이 보조 역할을 한다는 것은 현실 세계에서 가후쿠가 보고 싶은 오토의 모습을 그녀가 지키고 있다는 것일 것이리. 그러나 보조 역할은 오래가지 못한다. 녹내장이 결국 발병되는 것처럼 그들 사이에 어떠한 균열이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가후쿠는 과연 불행으로 치닫을 것 인가. 의사의 진찰처럼 다행을 맞이할 것인가.
오토의 섹스뿐 아니라 가후쿠의 차 안에서도 미세한 균열은 보여진다. 오토가 운전을 할 때, 가후쿠가 그녀에게 말한다. ‘난 당신을 깊이 사랑하지만 당신의 운전 방식은 견딜 수가 없어. 부탁이니 앞을 봐. 그리고 차선 변경은 왜 안 한거야.’ 이에 대해 오토는 이렇게 말한다. ‘까딱하면 그거 정신적인 학대야.’ 얼핏보면 이 대화는 사소하게 넘겨질 수 있는 대화지만 의미를 해석해보면 오토가 가후쿠에게 보이지 않는 압박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운전을 하는 행위는 매우 현실적이다. 다른 차에 부딪치면 사고가 나고 잘 못하면 타인에게 민폐가 될 수 있으니. 가후쿠가 오토에게 참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그러한 면이다. 현실적으로 운전을 해 나가듯이 삶을 살아가지 않고 계속해서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갖는 것. 이것이 가후쿠가 참을 수 없는 오토의 면이고 이 장면을 통해 은유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까 실은 가후쿠는 예술적 오르가즘을 갈망하는 오토와 대비되어 현실적이면서도 마음이 약한 인물인 것이다.
그리고 집에 오자마자 둘은 또 섹스를 즐긴다. 이 두 사람이 섹스를 하는 방식에도 균열이 엿보였다. 가후쿠와 섹스 후에 오토는 다시 자신만의 오르가즘을 느끼기 위해 시도한다. 가후쿠에게 몸을 비비며 이야기를 발설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이것은 오토가 가후쿠와의 관계를 온전히 만족하지 못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영화의 장면도 섹스 후에 가후쿠는 만족한 듯 눈을 감고 뒤에서 오토를 안고 있지만 오토는 슬픈 눈빛을 하고 눈을 뜨고 있다. 그리고 곧 그녀는 이제 고백과도 흡사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전생에 그녀는 고귀한 칠성장어였다. 다른 칠성장어처럼 위를 지나는 물고기에게 기생하지 않는다. 강바닥에 있는 돌에 입술을 붙이고 그저 흔들거리고 있는다. 깡말라서 해초처럼 될 때까지 그녀는 돌에 달라붙어 있는다. 다시 야마가 이야기로 돌아와서, 그녀는 야마가의 방에서 이해하게 된다. 돌에 달라붙어 있을 때 처럼 야마가의 방에서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이 방의 침묵은 물속과 아주 많이 닮아 있어.
그러다가 그녀는 이제 야마가의 침대 위에서 수음을 시작한다. 눈물이 흘러나오고 오늘은 그 눈물을 자기 징표라 여긴다. 그 때 누군가 들어왔고, 주위는 점점 어두워진다. 그 누군가의 발각 덕에 그녀는 이제 몰래 침입하는 것을 멈출 수 있다. 그녀는 새로 태어난다. 이렇게 자신의 위에서 수음을 하는 그녀를 가후쿠는 차마 두 눈으로 응시하지 못한 채 손으로 가려버린다.
다음 날, 가후쿠는 칠성장어에 대해 찾아 본다. 자막에는 이렇게 나온다. 칠성장어는 뱀장어도 생선도 아니다. 이것은 오토의 자아를 의미한다. 가후쿠에게 충실한 아내이면서도 다른 남자와의 일탈을 즐기는 면이 공존해서 이도 저도 아닌 그녀의 실체. 그러나 그러면서도 물 속의 침묵을 온 몸으로 흡수하듯이 누구에게도 기생하지 않는 자유한 영혼. 가후쿠에게 오토가 다가가서 어제 얘기 기억하냐고 묻는다. 이 행동은 본인이 발설했던 얘기 중에 하지 말았어야 할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가후쿠는 또 기억이 안 난다며 모른 척 한다. 이렇게 또 흘러가는 듯 했으나 이제 오토는 결의한 듯 보인다. 오늘 밤에 당신에게 할 얘기가 있다고. 그러나 가후쿠는 그녀의 결의와 마주하려 하지 않는다. 결국 가후쿠가 집에 늦게 들어가게 되어 오토는 급사한 채 발견된다. 가후쿠가 두려움에 집에 들어가지 않으면서 차에서 틀었던 바냐 아저씨 대사가 애처롭다.
“내 인생과 사랑을 어떻게 하면 좋지?”
그리고 바냐 아저씨 연극에서 바냐 아저씨를 맡은 그는 ‘왜냐하면 그녀의 정숙함이 철두철미하게 거짓이니까’ 라는 대사를 하다가 못 참고 들어가버린다. 아내의 죽음 이후 그는 바냐아저씨 역할을 견디기 힘들어보인다. 이로써 1부가 끝난다.
#가후쿠가 끝끝내 벗어나지 못한 것에 대하여
그렇다면 왜 오토는 가후쿠에게 자신의 일탈을 고백하고 싶어 했을까? 가후쿠가 모른 척 해준다면 감사한 일이 아닌가. 자신은 그 일탈을 즐기면 그만이니까. 도덕적인 방어 기제 때문일까? 야마가의 이야기에서 나오는 듯, 이제 수음을 끝내고 싶어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니다. 그녀는 방 안의 침묵을 깨고 새로 탄생하고 싶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의 침잠에서 비로소 나와 마주함으로써. 그러나 애석하게도 가후쿠는 오토가 죽은 뒤에 그 시도를 하게 된다. 2부는 그것에 대한 서사가 주를 이룬다. 1부는 오토와 가후쿠와의 관계가 그려졌다면 2부는 여러 인물들이 나온다.
먼저 운전사인 미사키부터 얘기해보자. 미사키는 어릴 적에 산사태로 엄마를 잃었다. 운전을 제대로 못 하면 폭력적으로 구는 엄마 탓에 그녀의 운전 실력은 수준급이다. 가후쿠는 처음엔 그녀에게 운전을 맡기기를 주저하지만 운전 실력 뿐만 아니라 차 안에서 침묵을 지키는 그녀를 신뢰하게 된다. 또 그녀의 엄마가 죽은 곳에 함께 가서 추모함으로써 비슷한 상처를 가진 둘은 서로를 위로한다. 이때 가후쿠가 그녀에게 말한다. "나는 제대로 상처 받았어야 했어. 그렇게 나는 오토를 영영 잃은거야." 제대로 상처 받았어야 했다는 대사에서 나는 가후쿠가 드디어 자기 자신과 온전히 대면할 용기를 낸 것이라 느꼈으나 결국은 아니었음에 실망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가후쿠는 마지막까지도 바냐아저씨를 연기하기 버거워했기 때문이다.
끝까지 가후쿠는 오토가 남기고 간 반복적인 카세트 테이프에만 의존할 정도로 약한 인물이었다. 물론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 알아가는 일이기도 하건만, 기나긴 서사와 여러 인물들이 가후쿠에게 계속해서 용기내라고 주지 시킨 것에 비해 결말은 너무도 미약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다시 나타난 아내의 불륜 상대, 다카츠키. 다카츠키는 가후쿠와 대비되는 인물이다. 그는 가후쿠처럼 인생을 분별력있게 살아가지 못 한다. 그래서 미성년자와 부적절한 관계로 인해 소속사를 잃기도 했다. 그는 가후쿠에게 말한다. " 가후쿠씨는 다른 이성과 자고 싶은 적이 없으신가요?" 가후쿠는 절대 없다고 한다. 이에 그는 말한다. "왜, 그런거 있잖아요. 몸을 섞을 때만이 알 수 있는 미묘한 것들 이요." 이것이야말로 죽은 오토가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닐까. 그리고 영화에서 계속 다카츠키를 몰래 사진 찍는 사람이 나온다. 다카츠키는 이 몰카를 증오한다. 자신을 옥죄는 은밀한 사회적인 시선을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야마가 이야기에 나왔던 감시카메라 와도 상응한다. 야마가의 집에서 수음을 하다가 그녀는 집에 침입한 도둑에게 들킨다. 그 도둑을 결국 죽이게 된다. 살인을 저질렀으나 아무도 그녀에게 그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대신 유일한 변화가 감시 카메라다. 순수한 영혼을 지닌 오토와 다카츠키를 압박한다는 점에서 이 두 소재는 의미를 같이 한다. 다카츠키가 순수하고 무력한 존재라는 증거는 연극 연습을 하다가 상해치사죄로 잡혀갈 때, 경찰에게 그냥 마이크로 사람들 앞에서 왜 자신을 데려가는지 언급하라고 할 때 현저히 드러난다.
다카츠키는 자신의 의지로 몰락을 택했으나 가후쿠는 끝까지 텅빈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못 했다는 점에서도 둘은 다르다.
수화로 대화하는 이유나라는 인물도 돋보인다. 이 인물은 여러 언어를 써서 극을 연출하는 가후쿠의 의도를 매우 잘 드러내어 준다. 유나는 말한다. "내 말이 전해지지 않는건 나에게 평범한 일이에요. 하지만 보는 것과 듣는 것은 할 수 있어요. 때로는 말보다 많은 것을 알 수 있어요. 이 연습에 중요한건 그런거 아닌가요?" 언어가 다르던 말을 못 하건 아무 관계없다. 중요한 건 전해지기 쉽지 않은 세세한 것을 전달하는 것이다. 오히려 언어에 의존하지 않으면 더 세세하게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가후쿠가 말했듯 알 수없이 소용돌이 치고 있었던 오토의 침잠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싶었던 의지로 보여졌다.
결국에 그 의지는 실패해서 이 여러 언어 연극이 제 각기 자기 말을 하는 고독한 연극으로 보여져서 안타깝긴 했지만 말이다.
마지막으로 영화 티탄과의 비교를 하며 이 글을 마치려 한다. 사실 오토를 보면서 알렉시아와 오버랩되는 지점이 보였다. 알렉시아가 성욕을 해소하는 대상으로 뱅상을 택하지 못 하고 차와 섹스하게 되는 것, 오토가 끊임없이 자신의 예술적 오르가즘을 위해 다른 남자들과 몸을 섞는 것. 뱅상도 가후쿠처럼 알렉시아의 욕구를 받아들이기 고통스러워 피하려 했다. 그러나 결국 아들로서가 아닌, 알렉시아라는 이름을 부르게 되면서까지 그녀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출산까지 감행한다. 알렉시아는 비록 출산 때문에 죽었지만 뱅상과 알렉시아가 각각 추구하던 욕망의 형태에서 벗어나 마주했다는 점에선 희극인 것이다. 가후쿠는 끝끝내 텅 빈 스스로를 받아들이지 못 하고 바냐아저씨를 힘겹게 연기한다. 오토가 남기고 간, 거의 자식과 비슷하다 싶을 정도의 의미를 지니는 카세트 테이프가 무색할 정도로. 어떻게 보면 남자들 입장에선 그녀들이 원망스러울 것이다. 왜 나의 예측 범위 안에서 욕구를 추구하질 않는 것인가. 별 수 있겠는가. 인간이란 존재가 그토록 복잡하고 세세하고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때로는 부조리한 것을. 그래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새롭게 태어나지를 못 하고 칠성장어처럼 물 속으로 침잠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 영화 대로 라면 우린 타협해야 한다. 그 혹은 그녀와.
그러나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만 물 속에서 나왔다고 해서 그도 반드시 나온 것은 아니기에. 인생은 늘 이런 엇갈림으로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