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이브 마이 카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이 영화화 된 것이다. 익히 알고 있었던 하루키의 열풍 대로 이 영화는 영화인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은 드라이브 마이 카 말고도 토니 타키타니,상실의 시대, 버닝과 같은 작품으로 영화화 되기도 했다. 사실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에 매료되어 있는 사람 중 하나다. 그 이유는 하루키가 자아내는 감상적 고독에 중독되었기 때문이리. 가장 처음 그의 작품을 접한 것은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 였다. 이 작품은 1960년대 말 정부의 적폐에 대항하여 한창 학생 운동이 진행되던 시기가 배경이다. 그 시대적 혼란 가운데 와타나베가 두 여자 사이에서 겪는 젊는 날의 연애 이야기는 지금에 와서 읽혀도 충분히 감동을 줄만한 것이었다. 미도리가 와타나베를 기다리고 있지만, 나오코를 보내고 난 뒤에 오는 슬픔과 고독은 우리에게 여지를 남긴다. 토니 타키타니, 헛간을 태우다(버닝의 원작 소설)도 마찬가지다. 여자는 대개 옷을 특별히 좋아한다던가, 마약에 중독되어있다던가 어딘가 심히 몰락에 빠져버린 상태고, 남자는 그 여자에 대해 사랑하거나 혹은 관조한다. 그리고 하루키만의 방식으로 여지를 남긴다.
삶은 어떻게 살아지는가에 대한 답은 어렵지만 삶이 결국 어떻냐에 대한 답은 쉽다. 허무하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들은 쉽게 자기 안으로 침잠해버린다. 그래서 하루키가 남기는 여지가 침잠하는 우리에게 전혀 불청객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이리.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을 이해하는 공식이 고독,수음,섹스 라면, 나는 이 작품 세계에서 다른 것을 찾고 싶었다. 그것은 바로 ‘실패’ 다. 버닝은 영화 제목대로 유아인이 강하게 태움으로써 오히려 하루키 작품을 넘어서 강렬한 분노를 표한다.
리메이크 한 영화가 본래의 소설을 그대로 따라가지 않고 훌륭하게 전복시켰을 때 나는 그 영화에 높은 평점을 준다. 그러나 이 영화는 원작보다 더 가라앉는다는 점에서 오히려 원작 소설보다 미약하단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토니 타키타니, 상실의 시대는 거의 원작을 그대로 따라간다. 글로 읽었던 이야기를 영상으로 다시 음미하면서 원작을 읽으면서 좋았던 느낌을 상기시킬 수 있는 정도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머릿 속에 만들어놓았던 소설의 분위기나 인물에 대한 이미지에 영화가 만들어놓은 영상이 그에 충족되지 못하면 실망을 하게 된다. 그래도 기본적인 틀이 따라와 준다면 어느 정도 타협은 할 수 있다. 그런데 드라이브 마이 카에 등장하는 가후쿠는 오히려 원작 소설 속 가후쿠보다 조금 더 나약한 인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깊이는 덜 할지라도 차라리 소설의 결말이 더 깔끔하다. 아래는 원작 소설의 일부다.
좀 자야겠다고 가후쿠는 생각했다. 한숨 푹 자고 눈을 뜬다. 십 분이나 십오 분, 그쯤이다. 그리고 다시 무대에 서서 연기를 한다. 조명을 받고 주어진 대사를 한다. 박수를 받고 막이 내려진다. 일단 나를 벗어났다가 다시 나로 되돌아온다. 박수를 받고 막이 내려진다. 일단 나를 벗어났다가 다시 나로 되돌아온다. 하지만 돌아온 곳은 정확하게 이전과 똑같은 장소가 아니다.
"잠깐 잘게.” 가후쿠는 말했다.
미사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대로 말없이 운전을 계속했다. 가후쿠는 그 침묵에 감사했다.
바냐 아저씨 연기하는 것에 구토하듯 염증을 느끼는 영화 속 가후쿠와는 달리 소설 가후쿠는 ‘나를 벗어났다가 다시 나로 되돌아온다’는 여유로움을 보여준다. 이 여유로움이 뜻하는 바가 무엇이냐하면 그토록 고통스럽던 아내의 외도에 태연해졌다는 의미다. 그리고 결말도 차 안에서의 침묵을 고집하는 가후쿠 답게 미사키도 그에 수동적으로 응해주며 끝이 난다. 원작 소설은 오히려 여지를 남기기 보다 안정적이다. 영화에서는 가후쿠가 미사키와 상처에 대해 서로를 위로하고 해소해주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 까지는 진부할 수는 있어도 적어도 희망적이긴 하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마지막 장면에서 연극할 때 수화하는 이유나의 대사 ‘아저씨 그럼에도 우린 살아가야 해요’ 이 대사가 오히려 크게 와 닿지 않는 이유는 가후쿠가 스스로를 성찰 했음에도 끝까지 남기는 여지 때문일 것이다.
그토록 성찰했음에도 여전히 객관적인 세계(무대 위)에서는 달라진 바가 없는 데, 우리가 왜 살아가야 할까? 인생에 물론 위로가 필요하지만 위로만이 있다면 그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위로를 얻고 능동적으로 이 삶을 다시 살아나가야 하지 않을까?
물론 영화가 소설보다 더 훌륭한 부분도 있다. 미사키란 인물에 대해서는 그렇다. 아래는 소설의 일부다.
“부인은 그 사람에게 애당초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던 게 아닐까요?” 미사키는 매우 간결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잤죠.”
어쩌면 소설은 너무도 작위적이고 쉽게 가후쿠를 위로한다. 죽은 아내의 진짜 진실된 마음에 어떻게든 침투하려 하기 보다는. 그런데 영화는 소설보단 미사키란 인물을 좀 더 담백하게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눈 밭에서의 대사 때문이었다.(다른 이유들도 많지만 굳이 꼽자면)
“가후쿠 씨는 아내의 있는 그대로를 바라봐 줄 수 없나요? 제가 보기엔 가후쿠씨를 사랑한 것도 후배와 잠을 잔 것도 그리 모순되어 보이지 않는데요.”
그러므로 드리이브 마이 카는 원작 소설보다는 훨씬 세세하게 우리에게 전달하려는 많은 의식이 보였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것 소냐의 대사가 무력하게 남아버렸다는 것에서 나는 이 작품에 아쉬움을 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