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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미 Mar 08. 2022

영화 <패터슨> 비평

찢어진 시를 쓰는 삶은 계속된다

나는 시를 쓸 수 없다. 내 삶은 시와는 거리가 멀다. 시적으로 세상을, 삶을 표현하는 것에 어색하다. 나는 시보다는 좀 더 악하고 자극적인 것들에 이끌린다. 인간 내면의 본능, 충동을 그린 프로이트 이론, 허무주의와 신의 존재에 대항하는 니체의 사상. 내가 느끼는 시는 무조건적으로 순수하고 착하다. 또 시를 쓰는 이는 절대 악할 수 없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이 영화를 추천받았을 때, 외면했었다.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영화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난 뒤 또 다른 누군가가 이 영화에 대해 다시 상기시켜주었다. ‘번역된 시를 읽는 것은 비 옷 입고 샤워한 것이나 마찬가지예요.’라는 글귀를 보여주면서 말이다. 나는 그 글귀에 감명받아 이 영화를 보았다. 패터슨이 시를 쓰는 모습을 보며 단지 나와 무엇을 쓰는 것인지만 다를 뿐,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를 다분히 글로 담아내려는 의지는 동일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 영화는 우리로 하여금 지금 당장 비 옷을 벗고 온 몸이 축축해질 정도로 인생을 생생히 느끼며 살아가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그래서 여전히 시를 낯설다 느끼는 사람이지만 패터슨에게 느낀 뜨거움을 이 글에 담아보려 한다.

그렇다면 시는 어떻게 태어나는가.


이 영화는 남들 다 쓰는 스마트 폰까지 고집스럽게 만들지 않으면서 삶을 온전히 시로 사유하려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영화는 잠에서 깨어난 패터슨의 아내 ‘로라’가 쌍둥이를 낳는 꿈을 꾸었다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패터슨의 직업은 패터슨 도시의 버스 기사다. 그는 식탁에 있는 성냥 칩을 어루만지며 출근을 한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시상을 되뇐다. 성냥을 주제로 한 시다. 운전석에 앉아 시를 쓰다가 버스 운행을 한다. 일이 끝나면 어김없이 집으로 와서 삐뚤어진 우체통을 제대로 세운다. 그리고 아내와 저녁시간을 보내고 바(bar)로 향한다. 아침을 맞이하는 두 남녀의 모습, 그리고 버스 운행, 퇴근하면 바에 가서 사람들과 담소 나누는 것. 이 반복되는 일상이 영화의 전체적인 틀이다.


시작되는 부분부터 쌍둥이에 대해 시사한 것으로 보아 나는 쌍둥이가 이 영화에서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영화를 보는 내내 신기하게도 곳곳에 쌍둥이가 등장한다. 쌍둥이가 무엇인지에 대한 견해는 대부분 ‘시의 운율’이었다. 1행, 2행 맞추는 것에 대한 은유라는 것. 이것이 가장 보편적인 견해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단지 이것만으로는 영화가 보여 주려는 주제에 완전히 다가가지는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쌍둥이의 특성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쌍둥이는 닮은 듯 다르다. 겉으로는 쌍둥이라는 명칭으로 불리지만 엄연히 다른 개체다. 이 세상의 것들은 대부분 완전히 동일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떤 점에서는 어떤 것들은 아주 같기도 하다. 실제 영화에서도 쌍둥이가 나올 때, 옷이라던지 신발이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시와 세계의 관계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패터슨이 영화에서 가장 먼저 쓴 시 ‘오하이오 블루 팁’ 은 성냥을 소재로 쓰였다. 성냥은 성냥의 원형을 가지고 있고, 거기서 새로운 시라는 세계를 창출해낸다. 시와 소재는 이처럼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똑같지만 어떤 점에서는 매우 다르다. 쌍둥이뿐만 아니라 영화에 등장하는 여러 도형의 패턴들. 그리고 패터슨 집에 걸려있는 반려견 마빈이 그려진 2개의 초상화(추상적으로 그려진 마빈, 귀엽게 그려진 마빈 2가지가 걸려있다) 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것으로 우리는 일상의 이중적인 측면을 엿볼 수 있다. 성냥이 시로 태어나는 것, 그러나 그 시가 성냥의 원형을 벗어날 수는 없는 것. 반려견 마빈은 그저 마빈이지만 그와 흡사하게 추상화처럼 그려질 수도 있다는 것. 그러나 그 그림 또한 어떤 면에서는 실제 마빈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 도형도 조금 찌그러진 도형, 깔끔하게 그려진 도형, 그러나 본질적으로 그 원형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이 모호함으로 세계는 이루어져 있다. 어떤 이는 그 속에서 패터슨처럼 시로 형상화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매일 현실에 대해 불평하는 패터슨의 동료처럼 염세적인 생각을 하는 이도 있다. 짐 자무쉬 감독은 이것으로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이 이 모호함이 가득한 세계에서 창출해내는 것은 무엇인가.

이 단조로운 영화에서도 두 번의 두드러지는 사건이 나온다. 먼저 사랑에 실패한 흑인 남자 애버렛이 벌이는 총살극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그는 바에 자주 오는 어떤 흑인 여성을 사랑한다. 러나 그 여인은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계속해서 그녀에게 구애를 한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거절뿐이다. 여기서 거절 외에 주목해야 할 점은 애버랫이 또 인정받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사랑에 대한 그의 간절함이다. 그녀는 말한다. 그가 자기 연기에 취해 있는 거라고. 그리고 바 주인도 실연당해 절망해 있는 애버랫에게 말한다.


 ‘자네는 배우를 해도 되겠어.’


공교롭게도 애버랫은 말한다.


‘ 저 배우예요.’


이 부분에서 우리는 느낄 수 있다. 배우이기에 자신의 진심조차 연기로 치부되는 아픔을 말이다. 우리는 이처럼 살면서 특정한 오해를 하기도 혹은 사기도 한다. 그토록 사랑한다고 호소해도 김앤장 변호사인 당신이 나를 좋아할 리 없다며 실제 사칭인지 아닌지 당신을 증명해보라고 요구한다. 진심은 이렇게 합리적인 의심으로 단죄되고 만. 그러나 혹자는 또 의심할 것이다. 애버랫이 연기를 하고 있기에 다른 이들도 모두 연기라 판단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그에 대한 답으로 감독은 패터슨의 버스 안에서 흑인 두 소년이 나누는 대화에 ‘허리케인 카터’라는 인물을 집어넣었다.


“허리케인 카터는 유명한 권투 선수였어. 저 뒤쪽에 살았어. 여기 패터슨에.”


“덴젤 워싱턴이랑 진짜 닮았어.”


“근데 감옥에 갇혔어.”


“왜 갇혔는데?”


“술집에서 엽총으로 사람을 쐈다는 거야. 하지만 카터가 한 짓이 아니었어.”


“그럼 풀려났겠네.”


“응. 수 십 년이 지나서.”


실제 그는 1966년에 패터슨의 한 식당에서 어느 일행에게 총을 쏴서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었었다. 사건 현장에서 카터의 지문이 나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흑인이라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그러다 1976년에 석방된다. 이 실화는 갑자기 엽총을 들고 사람들을 위협한 애버랫의 이야기와 매우 흡사하다. 카터가 단지 흑인이라는 사실만으로 오해를 사고 인권 유린을 당한 것과 애버랫이 배우라는 직업으로 인해 사랑하는 마음마저 연기라고 치부되는 것은 일맥상통한다. 그러므로 감독은 분명 애버랫의 마음은 진심이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계속되는 거절로 인해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진 그는 바안에서 총을 들고 사람들을 위협다.


 “내가 가질 수 없으면 아무도 가질 수 없어!”


 그러나 총살극은 패터슨의 제지로 인해 멈춰지고, 애버랫에게서 총을 빼앗은 바 주인은 서슴없이 그의 이마로 총을 쏜다. 마치 그 총마저 연기라고 당연히 여기듯이 말이다. 그리고 툭하고 그의 이마로 스티로폼 한 알이 떨어진다. 총살극이 끝나고 그는 말한다.

사랑이 없는데 다른 것이 다 무슨 소용이 있나요.

그 스티로폼 한 알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사랑이 실패해도 삶은 계속된다. 부정하고 싶은 세계가 부정당하기 싫은 하나를 전복시킨다. 부정하고 싶어도 삶은 우리를 계속해서 지나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 진짜 총알을 넣어서 비장해지기 위해 나는 다시 살아야 한다. 나약해진 마음에서 벗어나 더 진실되기 위해서, 총을 쏠 수는 없을지언정 객관적으로 이 세계를 받아들일 수 있는 의연한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 말이다. 후에 패터슨과 애버랫이 다시 마주쳤을 때, 두 남자가 나누는 대화는 과연 이와 일맥상통한다.


“흔히들 이런 말을 하죠. 여전히 아침에 해는 뜨고, 밤에는 진다고.


늘 또 다른 날이 온다고.”


애버랫의 말에 패터슨이 답한다.


“아직까지는.”


“네, 아직까지는.”


이제 이쯤에서 두 번째 위기에 대해 말해야겠다. 흔히 ‘위기’이라는 것은 스토리에 주인공에 변화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주인공의 안전된 세계에 위협을 가한다. 패터슨과 로라가 영화관 데이트를 하고 나서 집에 와보니 반려견 마빈이 패터슨이 쓴 시가 적힌 비밀노트를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이는 패터슨에게 있어서 일상의 커다란 파멸이다. 시는 곧 그 자신이니 말이다. 그리고 그 파멸은 패터슨에게 절망을 가져온다. 여기서 패터슨은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좌절한 패터슨은 그가 늘 시를 쓰는 장소인 폭포가 있는 공원으로 간다. 그곳에서 일본인 시인이자 여행객을 만난다. 그 일본인은 ‘패터슨’이라는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이 쓴 시집을 꺼낸다.  장면에서 흡사 쌍둥이와 같은 대치를 느꼈다. 도시의 대명사 패터슨과 그 도시에서 태어난 시인이 쓴 시집 ‘패터슨’의 대치. 사실 이 부분뿐만 아니라 도시를 지칭하는 대명사로서 패터슨은 영화에서 꽤 부각된다. 패터슨이 버스를 운행할 때, CITY OF PATERSON이라는 간판이 크게 보이기도 하고, 바에서 애버랫이 짝사랑하던 여인이 패터슨에게 농담을 던지기도 한다. 도시 패터슨에서 태어나 패터슨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니, 좀 이상하지 않나요. 그리고 그 일본인도 패터슨에게 묻는다. 패터슨 출신이냐고, 당연히 그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또 묻는다. 패터슨의 시인이냐고, 여기서 그는 단지 버스기사일 뿐이라고 답한다. 그리고 몇 번의 대화가 오고 간 뒤, 일본인은 패터슨에게 빈 노트를 주고 간다.


때로는 텅 빈 페이지기가 가장 많은 가능성을 선사하죠.

그리고 그는 이제 누군가의 물음으로써가 아닌, 스스로에게 시를 통해 질문을 던짐으로써 마침내 도시의 버스기사 패터슨이 아닌, 진정한 자기 정체성에 도달한다. 그 물음은 텅 빈 노트에 첫 번째 시로 이뤄진다.


The line (한 소절)
흘러간 노래가 있다
할아버지가 흥얼거리시던 노래
이런 질문이 나온다
“아니면 차라리 물고기가 될래?”
같은 노래에
같은 질문이 나온다.
노새와 돼지로
단어만 바꾼
그런데 종종 내 머릿속에
맴도는 소절은 물고기 부분이다
딱 그 한 소절만
“차라리 물고기가 될래?”

 패터슨이 머릿속으로 시를 떠올리는 장면이 나올 때마다 강인하게 떨어지는 폭포가 오버랩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찢긴 노트는 아무렴 상관없다. 그는 이제 그 스스로 물고기가 되어 온 몸으로 폭포를 맞으며 그 물속을 노니는 물고기가 되려 한다. 마치 시로 숨을 쉰다는 그 일본인 여행객의 말처럼 말이다. 그리고 번역된 시는 비 옷을 입고 샤워한 느낌이라는 그 말에 영감을 얻어 온전히 시에 돌파하려는 담대한 결의를 다지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그는 도시 패터슨에 사는 버스기사도 시인 패터슨도 아닌 그 자신이 시로 합치되려 한다는 것으로 아름답게 마무리된다. 이로써 영화 패터슨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무엇이 될래?


본 작가가 그린 마빈 초상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냥

여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냥이 있어요 4cm의 매끈한 소나무 막대는 머리에 거친 포도색 모자를 쓰고 차분하고도 격렬하게 오래도록 불꽃으로 타오를 준비를 하고 사랑하는 여인의 담배에 불을 붙여줄지 몰라요. 난생처음.

패터슨이 쓴 성냥에 관해 쓴 시를 읽고 그린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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