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나더 라운드에 4명의 중년 남성들을 보면서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왔던 4명의 소년들이 떠올랐다. 이것은 떠오를 수 밖에 없는 필연성으로 느껴졌다. 그들의 나이를 불문하고 일탈을 갈구하는 비밀스런 모습이 동일하기 때문이리. 차이점은 어나더 라운드에 그들은 세월이 흐른 늙은 나이에 찾아온 권태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라면, 죽은 시인의 사회에 소년들은 이미 그들 마음 속에 삶에 대한 순수한 열망이 뜨겁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권태로움과 권태롭지 않음. 이 극명한 차이는 있으나 일탈을 일삼는 면이 동일하다는 것에서 도출해낼 수 있는 논리는 인간은 나이를 불문하고 늘 새로움을 느끼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능이다. 그래서 일까.
이 욕구로 인해 늙든 젊든 위태로움을 자처한다.
그리고 또 두 영화의 공통점이 있다면 4명 중 한 사람은 죽게 된다는 것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선 아버지의 압박을 끝내 못 견딘 닐이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어나더 라운드는 톰뮈라는 체육교사가 가족이 없다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죽게 된다. 끝내 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보트를 타다가 죽게 된다. 두 사람 죽음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 압박에 의해 그들은 극도로 외로웠다는 것이다. 여기서 또 하나의 슬픈 논리가 도출된다. 아무리 새로움을 느끼기 위한 몰락의 여정이 짜릿할지라도 벗어날 길 없는 고독함에 갇혀버린다면 그 끝은 죽음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 그렇다면 이러한 의문이 들 것이다. 새로움을 느낌에도 불구하고 고독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 이 글은 그에 대한 답을 하는 글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단순히 술에 대한 중용이 아니라 삶 자체의 본질적인 관념에 닿아있기 때문이다.
2. 니체의 디오니소스적인 관점에서
4명의 남자들은 각각 고등학교에서 심리학(니콜라이),역사(마르틴),음악(페테르),체육(톰뮈)을 가르치고 있다. 학생들은 술로 경주를 하며 매우 활기찬 모습을 보이는 반면 그들은 매너리즘에 빠져 수업에 영감을 불어넣지 못 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마르틴은 그의 역사 수업으로는 대학에 합격하기 힘들 것 같다는 이의 제기까지 들어온다. 그리고 집에서는 아내에게 ‘처음 만났을 때의 마르틴이 아니야.’ 라는 대답을 듣는다. 집에서든 학교에서든 투명인간 같은 취급을 받으며 사는 마르틴은 니콜라이 생일에 참석하면서 자신의 인생에 대한 한탄을 털어놓는다. 이에 니콜라이가 혈중 알코올 농도 0.05%를 유지하면 자신감과 용기가 더 생길 것이란 가설을 말한다. 술자리가 끝나고 나서 4명의 남자는 숲에서 놀이를 하며 흥에 겨워 뒹구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흡사 디오니소스 축제와 비슷하다.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동물의 가죽을 입고 춤을 추고, 그러면서 자기 자신에게 낯설어진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스스로에게서 벗어난다. 그들 또한 레스토랑 내에서 서슴없이 춤을 추고 즐거워한다. 내면의 긴장을 해소함으로써 서로 어린아이처럼 개별성을 버리고 바닷물처럼 섞인다. 이렇게 도취된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자극을 주는 존재로 변하게 된다. 이 얼마나 자연적이고 예술적인가.
어나더 라운드에서 축제, 춤을 추는 장면이 곧잘 등장하는 것은 굉장히 디오니소스적이다.
이 디오니소스적 쾌락에 흥미를 느낀 것일까. 마르틴은 그 다음 날, 술을 마시기를 시도한다. 그리고 곧 4명은 모여서 실험을 하기로 결심한다. 첫번째 실험은 꽤 조심스럽다. 매일 저녁 8시까지만 술을 마셔야 한다. 헤밍웨이처럼. 근무시간 중에만 마셔야 하며 주말에는 금주다. 결과는 매우 좋았다. 마르틴은 루즈벨트, 윈스턴 처칠, 히틀러를 비교해서 기억에 남을 수업을 했으며 아내와 여행갈 계획도 세우려 한다. 흡족함을 느낀 그들은 2단계를 시도한다. 술을 더 마시면 차원높은 무언가에 닿을 수 있으리란 욕망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를 합리화 한다. 알코올 중독자는 이렇게 스스로 조절해가며 마실 수 없다고.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조절해가며 단계를 높이는 것이 이미 중독의 시초라는 것을 그들은 몰랐다. 왜냐하면 아직은 삶에 있어서 더 추락할 여지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 디오니소스는 해체,열과,황홀,광란을 주관하는 사나운 신이다. 디오니소스적인 예술에서는 한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동적이다. 음악이나 춤, 혹은 다른 예술에 사로잡힌 사람은 절도를 잃게 된다. 이렇게 예술에 도취한 상태에서는 자신이 도취했다는 의식도 사라진다. 디오니소스적인 열광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지 않는다. 디오니소스적인 인간은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시도를 한다.”
그렇다. 그들이 행하는 실험은 예술이었던 것이다. 4명이 모여 실험을 모의하는 장면에서 슈베르트의 환상곡이 나오는 것은 좀 더 환상성을 갈구하는 그들의 욕망을 오묘하게 드러내준다. 곧 1단계에서 머무르지 않고 니체의 말대로 유동적이고 본능적으로 그들은 2단계로 향한다.
2. 3단계로 가자, 삶을 향한 희열이여
2단계는 각자 다양한 양의 알코올을 매일 섭취하는 것이다. 2단계 까지도 삶은 허용해주었다. 마르틴은 아내와의 적극적인 섹스로 더욱 가까워졌고 수업도 아이들의 호응도는 높아졌다. 다른 남자들도 마찬가지. 그 와중에 톰뮈는 자신의 집 마당에 늙은 강아지가 아닌 아내와 아이가 있었으면 하는 외로움을 표출한다. 이 사소해보이는 장면은 꽤 중요하다. 왜냐하면 나머지 3명의 남자는 술에 도취되어 인생에 만족스레 섞이고 있는 반면 톰뮈만이 그 안에서 이질감을 느끼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그 이질감이란 알코올에 도취하는 것에서 오는 쾌락의 형태다.
알코올이 일으킨 삶의 변화가 고질적인 외로움까지는 책임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
이제 이 서사는 3단계를 향한다. 궁극의 카타르시스까지 가보자는 니콜라이의 제안으로. 그런데 이 카타르시스란 말은 너무도 가벼웠다. 오히려 그들이 타인의 카타르시스를 유발하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 마르틴은 부부사이 불화가 끝으로 치닫아 아내가 집을 나가버리고 만다. 그리고 아이들이 그에게 고백한다. 실은 마르틴이 늘 술에 취해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이것은 마르틴이 언제부턴가 객관성을 잃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밀을 가진 자가 객관성을 잃어버리고 그것이 탄로나면 그 순간 그 비밀은 논리적으로 말해서 비밀이 아니게 되는 것이며 조금 감상적으로 말하자면 빛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제 그들의 실험은 예술이 아니라 추악함으로 변모해버린 것이다. 다른 남자들도 마찬가지. 니콜라이도 가정에 불화가 온다. 파국으로 치닫은 이 실험을 그들은 끝내기로 한다.
들뢰즈는 이렇게 말한다.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깊이 빠져들지는 말고 경험 삼아 상처를 늘일 정도로만 살짝 알코올 중독자가 되거나, 미쳐 보거나, 자포자기해 볼 텐가? 어느 쪽에 서건 모든 게 서글퍼 보인다.”
세계가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중독자가 되건, 허용하는 선에서만 타협해서 마시건 어쨋든 삶은 서글프다는 것이다. 유용성을 중히 여기는 자들은 나의 말에 반박할 것이다. 그들이 0.05% 혈중 알코올 농도를 유지하면 충분히 서글프지 않고 행복했을 것이라고. 너무도 단순한 생각이다. 새로움을 늘 새로움이라 느낄 수 있다면 권태로움이라는 것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예 도취해서 몰락하든 그러질 못 해서 전전긍긍하면서 살든 인생이란 권태에서 벗어나기 어렵기에 서글픈 것이다.
3. 키르케고르여, 당신의 철학으로 삶의 실패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렇게 허망하게 끝을 맺지 않는다. 마르틴의 학생들은 무사히 졸업했다. 그리고 음악교사인 페테르가 학교 1년 더 다닐까봐 걱정해서 상담해줬던 세바스찬이란 학생도 알코올의 힘으로 가까스레 면접을 합격한다. 면접하는 동안 학생이 키르케고르에 대해 말하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불안은 실패에 대한 인간의 대응이다. 타인과 삶을 사랑하려면 자신의 실패 가능성을 받아들여야 해요.”
이 학생의 말은 영화의 주제와 맞닿아 있다. 그렇다. 4명의 남자는 실험에 실패했다. 그러나 도전했기에 스스로에게서 벗어나기도 해보고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들 중에서 진정 비극의 끝으로 나아간 자가 있었으니 톰뮈다. 톰뮈는 아끼는 강아지와 보트를 타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 그는 그 누구보다 실험에 적극적이었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그가 아끼던 제자가 장례식에서 관위에 장미 한 송이를 올려놓았을 때 너무도 슬퍼하고 말았다. 실패할 가능성이라는 것은 타인에 존재한다는 것이고, 이것은 결국 타인이 없으면 실패할 여지도 없다. 타인에게서 찾지 못한 실패의 여지는 삶 자체로 번져버렸다.
그럼에도 나는 감히 희망을 말하고 싶다.
키르케고르는 ‘사랑의 역사’ 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란 자신이 죽기 전까지 자기 자신의 행복 여부를 단언할 수 없다.”
톰뮈는 죽기 직전까지 스스로를 불행하다 느꼈겠지만, 그가 축구 수업에서 아끼던 그의 제자는 그에게서 느낀 사랑을 평생 기억할 것이다. 그가 그렇게 죽었기에 더욱 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축구 수업 동안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 했고 부모님도 잘 챙겨주지 않아 나약해보였던 그 소년은 톰뮈가 남기고 간 사랑으로 하여금 자신의 인생을 조금 더 희망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4. 끝으로 이 글을 마치며
술은 일시적으로 나를 벗어나서 긴장감을 풀어주고 타인과 섞일 수 있게 해주는 묘약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순간일 뿐이다. 다시 개별성으로 돌아가면 오히려 그 취기는 독이 되어 기댈 곳 없는 자에게는 극한의 고독의 나락으로 빠지게 한다.
진정한 사랑은 무엇인가. 나 자신을 넘어서게 하는 힘이다. 그리고 그 사람의 영혼을 내적으로 무한히 자유롭게 만들어준다.
어쩌면 나의 이러한 말이 슈베르트의 환상곡처럼 오묘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오묘할 수 밖에 없다. 그만큼 사랑의 자유함은 언어로는 표현의 한계가 생길 수 밖에 없는 것이기에. 그리고 그렇게 오묘하기에 우린 개별적으로 존재하다가도 때로 타인에게 침투하고 싶은 강한 욕망을 느낀다. 마치 마르틴이 인생을 다르게 바꿔보고 싶은 욕구를 실행하는 것 처럼. 이 영화는 단순히 술에 대한 경계심을 말하지 않는다. 마르틴이 수업 도중에 언급했던 것 처럼 인생은 결코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 다는 것. 혈중 알코올 농도 실험이 실패한 것도, 톰뮈가 죽은 것도, 또 마르틴의 아내가 기적적으로 당신이 그립다는 문자를 보내온 것도 말이다. 내가 고독의 나락으로 떨어질지, 타인의 영혼을 들여다 보고 있을지, 권태로움에 덜덜 떨고 있을지. 그럼에도 이 영화는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