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요 하면 안 됩니다
팀장님 말씀을 너무 잘 들은 게 문제였다. 내 사수였던 오** 부장의 말은 늘 정확했고, 그녀의 조언은 항상 내게 좋은 방향을 열어주었다. 그날도 그녀가 툭 던진 말에 훅 낚였다.
오부장) 우리 딸 친구가 올봄에 빈소년에 갔는데…
나) (깜놀) 예에? 아는 애가 빈소년요?
오부장) 그렇다니까~~
야, 내가 아들이 있으면 끝까지 함 해본다!
그.. 그래? 나는 아들이 있으니까 함 질러볼까? 업무 차 빈소년합창단 한국 공연 기획사 김** 차장을 만난 자리에서 사알짝 물어보았다.
나) 저.. 빈소년 오디션요.. 올해는 안 하나요?
김차장) 작년 공개 오디션은 일회성 행사였고요,
올해는 단장이 같이 안 와서 계획이 없어요.
근데 누가 오디션 보려고요?
아드님이 노래하나요?
나) 네.. 지금 서울시소년소녀합창단에 있긴 한데...
없으면 됐어요~ ^^a
여기서 끝난 일인 줄 알았... 는데 갑자기 연락이 왔다. 예정에 없던 단장 방문 일정이 잡혔고, 특별 오디션을 볼 테니 준비하란다. 겨우 이주일 밖에 안 남았는데?
나) 감사합니다. 근데 넘 갑작스러워서...
혹시 오디션은 몇 명이나 보나요?
저희 애 합창단 친구들도 관심이 많아서…
김차장) (단호박) 아드님 포함 딱 두 명만 ㅎㅎ
다른 친구는 안될 것 같습니다.
나) 그래요? 그럼 준비를 어떻게 하는지 팁이라도…
기획사) (골똘) 작년에 보니 한국 애들이 팔 벌리고
서서 똑같은 포즈로 “동요” 부르는 거
되게 싫어하더라구요.
아하, 외국인 눈에는 그게 이상한 거구나! 하긴 콩쿨 나가면 애들이 전부 팔 늘어뜨리고 뻣뻣하게 서 있거나 손 모아 쥐고 동그라미 그리는 거 나도 싫었다고!! 오케이, 팁 하나 얻었고~~
원래도 빈소년을 좋아했거니와 단장을 직접 만날 기회라니... 떨어져도 우리가 그런 사람을 또 언제 만나보겠나 싶어서 일단은 해보자 했다. 그런데 오디션 정보가 너무 없어서 막막한 거다. 해 본 사람이 많아야 얘기도 넘치는 법인데 이건 아는 사람조차 몇 안되니... 염치 불고하고 작년 공개 오디션에 붙어서 빈소년에 갔다는 손**군 어머니에게 다짜고짜 연락을 드렸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꼬치꼬치 물어오니 성가실 법도 한데 고맙게도 경험한 것을 다 알려주셨다.
작년엔 1절씩만 불렀고, 아이들만 오디션 장에 들어가고 부모는 모두 밖에서 대기, 인당 10분도 시간을 안 줘서 사실 대화할 일이 없었다 등등. 그리고 실제 빈소년에 입단해서 겪은 더 많은 흥미로운 것들에 대하여..
들은 바 대로 아들은 2주 동안 <Die Forelle> <Panis Angelicus> 두 곡을 딱 1절씩만 연습했다. 동요를 싫어한다니 빈소년 레퍼토리로 하는 게 맞겠고...독일어 이력서도 있으면 좋겠지? 그래도 명색이 오디션인데 형식은 갖춰 보자고!
서울시합창단 캠프를 떠나는 아들에게 목 관리 잘 하라고 그렇게 잔소리를 했건만, 오디션 전날 아들은 목이 다 쉰 채로 돌아왔다. 아이고 두야~ 얼마나 신나게 소리 지르고 놀았으면 T T
아들은 이래서는 못한다며 오디션을 안 보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래 뭐 니가 자신 없는 건 알겠는데.. 안 하더라도 가서 직접 얼굴 보고 못 한다 하는 거야. 약속해 놓고 일방적으로 나타나지도 않는 건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알겠니?
하아아.. 오디션은 말로만 듣던 거와 크게 달랐다. 첨부터 부모도 같이 들어오란다. 엉? 애만 가는 거 아니고? 나 영어 울렁증 심하게 있는데...
인상 좋은 빈소년 단장 게랄드 비어트(Gerald Wirth)가 인사를 건네는데.. 아.. 벌써부터 아득해졌다. 기획사 쪽 통역사가 있긴 했지만 그가 우리만 쳐다보며 얘기를 하니 떠벌떠벌 되도 않은 영어로 대답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아들이 목이 별로니 감안해 주세요”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벌써부터 기에 눌려 혼이 나가서는 저 먼 안드로메다까지 달리는 중이었고, 아들은 아들대로 첨 만나는 외쿡인에 바짝 쫄아서 안 하겠다 못하고 시킨 대로 했다.
그의 반주에 맞춰 준비해 간 악보를 부르는데 1절 이상은 못 부르는 이상한 오디션 ㅋㅋㅋ
Mr. 비어트가 왜 그 뒤는 모르냐 묻는데 작년엔 이랬다고 들었다 어쨌다 할 수가 없는 거다. 어떡하긴? 했던 부분 또 해야지 ㅋㅋㅋ
피아노 옆에서 불러 봐라, 옥타브를 올려 봐라, 저기 앞으로 가서 3천 명의 관객 앞에서 부른다고 생각하고 솔로를 해 봐라, 내 피아노 소리를 듣고 음으로 따라 해 봐라, 계명창으로 부를 수 있겠어? 그걸 몇 도 이상 올려 봐라 내려 봐라, 이 음의 3도 위는 무슨 음? 이 박자를 듣고 다음 박자를 칠 수 있겠어? 노래는 누구한테 배웠어? 무지하게 디테일한 갖가지 주문을 쏟아내고는 이어지는 긴-긴 인터뷰...
Sheen, 노래 좋아해? 얼마나 좋아해? 아~ 많이? 그래, 음악은 행복한 거니까~~ 엄마는 얼마나 오래 떨어져 있어 봤어? 이삼일이 전부라고? 그럼 그 보다 더 오래 떨어져 있을 수 있니? 방학 때만 엄마 만나는 거 가능하겠어? ... ... 어디 보자, 말러 3번을 연주한 적이 있구나? 빔 밤 빔 밤~~ 같이 해볼까? 그렇지 좋아! ... 오, 맥베드 오페라도 했어? 플리언스가 아빠와 헤어질 때의 느낌은 어땠니? 넌 그걸 어떻게 연기했지? 보여줄 수 있겠니? ... ...
크아.. 엄마는 끼어들 여지도 없이 10분 이상 애한테만 집중되는 질문 공세를 보고 있자니 진작에 영어 공부 좀 시킬 걸 후회막급이었다. 떠듬떠듬 손짓 발짓 엉터리 대화를 하느라 아들은 허옇게 질려 있었고 그렇게 진땀을 빼고 나니 이미 한 시간이 흘러 있었다. 빈으로 돌아가서 1-2주 안에 연락을 주겠다는데, 더 잘할 걸 아쉬워해도 소용없는 시간. 노래도 맘에 안 들고 인터뷰는 더 맘에 안 들고... 이걸로 됐다. 좋은 경험했으니 이제 맘에서 내려놓자. 그래 빈소년은 뭔 빈소년이냐 ㅎㅎ 송충이는 솔잎이 제일 맛있는 거다.
쳇, 이럴 줄 알았으면 셀카나 같이 한 장 찍자 할 걸.. 우리가 언제 저 사람을 또 만날 거라고.. 그림자만큼 기다란 후회가 돌아오는 내내 뒤따라왔다.
_20170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