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비닐로 곱게 쌓여 있었지만 역시나 세월에는 장사가 없어 모서리와 곳곳이 닳아있는 10권의 일기장이었다.
"이게 뭐야?"
"일기장. 알잖아 우리 엄마 유별난 거. 일기며 상장이며 하나하나 모아두셨어."
관음증에 걸린 정신질환자들을 앞장서서 욕했던 나였지만 재미있다.
해도 해도 너무 재미있다.
지금도 하루 걸러 한 번씩 유치해지는 그의 진짜 유치했던 시절의 이야기라니.
설레는 마음으로 첫 페이지를 넘겼다.
○○초등학교 2학년 1반 4번 문작음
남자 친구의 본명은 문작음이 아니지만 실제로 키가 작기에 문작음이라고 부를 예정이다.
"자기 애기 때 꿈이 뭐였어?"
"대통령!"
"과학잔데?"
"자기 애기 때 누구 존경했어?"
"장영실! 아, 방정환!"
"부모님과 선생님이라는데?"
그는 어린 시절의 좋은 점은 유지하고, 고칠 점은 고치지 못한 어른으로 성장했다.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개그맨을 꿈꿨지만 동료들을 웃기는 것으로 만족하는 회사원이 되었으며, 존경하는 인물은 그 시점에 읽고 있던 책에 따라 바뀐 것 같다.
작음이와 나는 비슷한 듯 다르다.
공무원인 아버지와 대기업 직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작음이는 교육열 높은 부모님의 스파르타식 가르침을 받아 깡촌에서(미안)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대학교에 입학했고 현재 대기업에 재직 중이다.
반면, 스물네 살에 나를 낳고 비교적 이른 나이에 싱글맘이 된 엄마는 나에게 무엇도 강요하지 않았다. 공부해라, 누구랑 놀지 말아라, 의사 변호사가 되어야 한다 등 주변 친구들이 으레 듣는 말들을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다. 다행스럽게도 승부욕을 타고나 여차저차 괜찮은 대학교를 갔고, 어찌어찌 대기업에 다니고 있다.
비슷한 듯 너무나도 다른 우리의 가장 큰 차이점은 겁이다. 작음이는 겁쟁이고 나는 겁이 없다. 작음이는 냉장고에서 나온 생수병이 실온에서 내는 펑소리에도 박격포 소리를 들은 듯 놀라고, 나는 자정 넘어 집 안의 불이란 불은 다 끄고 무서운 영화를 보는 태생적 변태다. 그래서 작음이는 그러려니 살아왔다. 이게 맞나 싶지만 부모님이 맞다고 하셨기에 스트레스조차 사치였다. 모든 회사원은 이렇겠지, 어딜 가나 똑같겠지, 내가 조금 더 노력하면 되겠지 하며 착실하게 살아왔다.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사실 그렇게 살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누군가는 겁 없이 달려드는 내 모습이 부럽겠지만 나는 누구보다 물 흐르듯 살고 싶었다. 근데 뭐 노력해도 역류하는 물줄기를 내가 어쩔 도리가 있나.
나는 N잡러가 되어 회사원, 취업 컨설턴트 및 콘텐츠 기획자로 활동하며 일 못해 죽은 귀신이 붙은 듯한 삶을 살고 있고, 작음이는 내 짝꿍이 된 이후 마음속에 품고만 있던 새로운 꿈을 이루기 위한 도전을 시작했다. 가능성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기에 이 일기의 연재가 끝나기 전, 인생 2막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노트북을 덮으려던 찰나, "자기 지금 밖에서 무슨 소리 들렸지?"라고 묻는 작음이를 보며 잠시 확신을 취소할 뻔했지만 열심히 응원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