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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현타 Jul 05. 2022

남자 친구의 첫 여자 친구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나는 홍익인간과 연애 중이다.

모든 사람들이 다 잘 지냈으면 좋겠고 여럿이 함께할 때의 시너지를 믿는 작음이*와 달리 나는 내가 잘 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고, 다들 좀 나가줬으면 하는 마음을 가진 사익인간이다.

*작음이: 본명은 아니지만 실제로 키가 작아 문작음이라고 부를 예정이다.


낯간지러운 구애의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그를 보며 신기할 따름이었는데 일기장 무덤 속에서 작음이가 될 성 부른 떡잎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날씨가 흐린 걸까 네 마음이 흐린 걸까


혜진이.

성은 알 수 없지만 이름이 예쁘다. 무언가 굉장히 말갛게 어여쁘고 인정이 넘치되 똑소리 날 것 같은 이름이다. 그러고 보니 화사 본명도 안혜진 아닌가. 탑모델 한혜진 씨도 있고. (별안간 내 이름도 작명소에서 20만 원 주고 지어온 고급 이름임을 이유 없이 어필하고 싶어다.)


좋아하면 괜히 괴롭히고 싶고 싸움 걸고 싶어 진다는 말에 동의한다. 내가 철저히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사랑을 느끼는 몇 가지 포인트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상대방이 하찮아 보일 때다. 하찮음은 참을 수 없는 귀여움으로 이어지고 이내 사랑으로 번진다. 안 그래도 작은 작음이가 쭈굴거릴 때마다 삽으로 떠서 어디론가 휙 던지고 싶다.*

*이 대목은 작음이도 익히 알고 있는 내 애정 표현인데 어디에 던져놔도 다시 되돌아올 거라고 따박따박 받아쳐서 조금은 무섭다.


나는 열 손가락 중 네 손가락에 반지를 끼고 있다. 두 개는 겉멋이고 두 개는 의미가 있는데 오른손 검지 손가락에 자리한 반지는 내가 잘못된 연애의 길을 가려고 할 때마다 나를 잡아주는 내비게이션이 되어 준다. 때는 바야흐로 사회 초년생 시절, 당시 나는 대학교 4학년 때부터 만나던 남자 친구와 함께였다. 그는 암막커튼 같은 사람이었다. 날 누구 보다 포근하게 감싸줬지만 실은 어두웠던 사람.


천둥벌거숭이 외동으로 자란 나는 사랑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연애에 있어서도 다르지 않았다. 복잡한 서울 한복판에서 내 회식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남대문부터 광화문까지 수십 바퀴를 돌던 그가 당연했고, 나 조차도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유로 오만 짜증을 부릴 때에도 남자 친구이기에 오롯이 받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황당한 것은 이런 상황에서 먼저 헤어짐을 고한 주체가 나였다는 거다. 그는 어린 나이였지만 본인의 미래를 위해 중국에서 사업을 시작했고, 나는 장거리 연애를 견디지 못했다. 딱히 외로움을 타는 성격도 아니었지만 음성과 텍스트만으로는 내 이기심을 채울 수 없던 것 같다. 처음에는 괜찮았다. 아니 오히려 편했다. 가장 에너지 넘치는 나이에 남들이 부러워하는 금융권에 입사해서 돈도 잘 벌던 나를 막을 수 있는 건 엄마의 등짝 스매싱뿐이었다.  


그리고 한 달쯤 흘렀을까. 거의 매일 울었던 것 같다. 내가 받았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사소한 일상을 공유하던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 너무 늦게 깨달은 것이다. 행동력 빼면 시체인 나는 단박에 그를 다시 붙잡고자 했지만 이미 두 번의 헤어짐을 겪은 그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처음 이별을 말했을 때 그는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 나를 붙잡았고 다시 만나게 되었지만 두 번째 만남에서도 나는 갑질을 해대며 그를 환멸 나게 만들었다.


그에게서 받은 반지를 네 번째 손가락에서 두 번째 손가락으로 옮기며 다짐했다. 순간 편하자고 평생 후회할 짓 하지 말자. 소중한 게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자. 작음이는 그 반지를 굉장히 불쾌해하지만 사실 암막커튼 덕분에 비로소 인간이 된 나를 만나고 있는 거다. 과거의 그를 붙잡으며 눈물 콧물과 함께 마흔 살이 될 때까지 기다리겠노라 말했었는데(그땐 40이 세상 먼 미래인 줄) 지금 내 옆에는 하찮은 작음이가 배시시 웃고 있다.


복잡 미묘한 마음에 코를 찡긋하며 끼를 떨어보았는데 "자기야 혜진이는 고혜진이야 고혜진 히히"하는 작음이를 보자마자 쥐어 박고 말았다. 이걸 죽여살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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