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바이트가 끝난 후, 그리고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는 주말이면 서울을 쏘다녔다. 고시원에서 나와 목적지도 없이 걷고 또 걷기도 했고, 역시 내릴 정류장을 정하지 않고 버스를 타기도 했다. 겨울이었지만 걷다 보면 추위를 잊었다. 노량진에서 멀지 않은 신림동에서 두 언니들이 고시를 준비하고 있었지만 언니들에게 연락한 적은 없었다. 그 당시엔 엄마, 아빠뿐만 아니라 언니들도 내 삶에서 제외시키고 싶었던 나였으니까. 무엇보다 공부에 여념이 없는 그들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았고, 나 역시 그들을 원하지 않았다.
많은 건물들과 상점들, 사람들을 지나다니다 보면 이 서울 하늘 아래 혼자인 건 나뿐인 것만 같았다. 다들 누군가와 함께 걷거나 전화 통화를 했다. 나만, 나에게만 함께 걸을 사람도, 통화할 사람도 없었다. 저기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된 혼자라는 차갑고 뼈아픈 시림이란. 그럴 때 내가 찾은, 나도 누군가와 연결고리를 갖는 방법이 있었다. 바로 상점이나 음식점에 들어가서 손님이 되는 것이었다! 상점이나 음식점의 주인들은 하나같이 나를 친절히 반겨주었고, 약간의 추위와 허기, 외로움까지 3종 세트로 잠시나마 해결이 가능한, 아주 신박한 방법이었다.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 손님을 필요로 했고, 나는 가슴속 차갑고 뼈아픈 시림을 해결하기 위해 그들과 그들의 협소한 가게 공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내 주머니 사정은 뻔했으므로 주로 작은 분식집이나 포장마차, 중저가 브랜드 옷가게 등이 바로 그 대상이었다.
"어서 오세요."
분식집주인아주머니가 반갑게 인사를 건네시면 나는 빙긋 웃고 떡볶이를 주문했다. 떡볶이는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그렇지만 이제껏 살면서 엄마가 해준 떡볶이를 먹어본 건 스무 번도 채 안되었다. 엄마는 요리를 싫어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는 형편이 어려워 식재료를 살 돈이 부족하니 자연히 요리를 덜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형편이 점점 나아져도 엄마는 여전히 요리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어떤 날은 좀 전에 떡볶이를 먹고 얼마 안 돼 걷다가 주황색 천막이 쳐진 포장마차에 또 들어가기도 했다. 그만큼 떡볶이를 좋아해서라기보다는, 내가 들어가면 만면에 미소를 띠는 주인아주머니, 아저씨의 얼굴을 보는 게 좋아서였던 것 같기도 하다. 떡볶이 한 접시를 앞에 두고 나에게 미소 지어줄 사람이 세상에 그들뿐이니. 삼천 원짜리 인스턴트 행복이랄까. 아주 짧고, 강렬한 맛의.
서울에 올라간 지 몇 주쯤 되었을까. 큰언니에게 전화가 한 통 왔다. 아마 엄마와 통화를 한 모양이었다. 언제 한 번 만나자고 했다. 며칠 후 저녁, 우리는 서울대입구역에서 만났다. 저녁을 먹으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렇게 밉다가도 얼굴을 마주하면 미움이 사그라드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 달 후 한 번 더 얼굴을 봤다. 큰언니는 내가 지내는 고시원 방에도 왔다. 방이 너무 좁았지만 우리는 작은 침대에 불편하게 앉아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렇게 밤을 하얗게 지새웠다.
한 주간의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하루 종일 서울 구경을 하려고 마음먹은 일요일이었다. 번호도, 노선도 처음 보는 버스에 무작정 올라 창밖의 새로운 풍경을 눈에 담았다. 그런데 그때,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왜."
오랜만의 통화였지만 내 첫마디는 퉁명스러웠다. 엄마는, 아빠와 함께 서울에 와서 언니들과 같이 있다고 했다. 난 전혀 반갑지 않았다.
"엄마가 갈게."
"됐다고!"
짜증을 잔뜩 섞어 내뱉은 후,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전화벨은 다시 울렸지만, 난 받지 않았다. 평화로웠던 마음이 일렁이자 화가 솟구쳤다. 나는 그날 어두워질 때까지 걷고, 걸었다.
비슷하게 흘러가던 어느 날, 그날은 유난히도 고시원 좁은 방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숨 막히게 좁고 답답한 그 방에 들어가는 것보다 상쾌하게 겨울바람을 쐬고 싶었다. 아무 버스나 올라타 목적 없이 흘러가고, 모르는 정류장에 마치 익숙한 척 내리고, 날 반겨줄 작은 가게가 보일 때까지 걷고 또 걷는 밤이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밤이 깊어 버렸다. 나는 그제야 덜컥 겁이 났다. 막차시간도 모르는데 어떡하나. 당시에는 택시를 탄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 이유로 첫째는, 가끔씩 뉴스에 보도되는 택시기사 관련 범죄 사건 때문에, 둘째는 요금 때문이었다. 노량진 가는 막차가 이미 떠났을지 어떨지도 모르는데 무작정 버스를 기다렸다. 만약 막차가 끊겼다면 어디서 밤을 보내야 할까, 걱정과 고민에 별의별 상상을 하고,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노량진'이라고 적힌 파란 버스가 왔다.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고 버스에 올랐다. 정류장에 도착해 보니 노량진은 밝을 때와는 다르게 꽤 한산했다. 적막감까지 감돌았다. 약간의 공포심도 느껴졌다. 그제야 내가 아무도 없이 정말 혼자 낯선 곳에 와서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밉던 엄마도 생각났다. 무엇에게서 달아나려고 이렇게 낯선 곳을 누비고 다녔을까. 이렇게 걷고 걸으면 내가 벗어나려 하는 것들에게서 도망칠 수는 있는 걸까. 터덜터덜 고시원 방으로 들어서자 눈물이 핑 돌았다. 돌아가자. 집으로 가자.
그렇게 나는 3개월 간의 아르바이트를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짐이랄 것도 없는 것들을 주섬주섬 포장하는데, 싸구려 책꽂이 하나와 작은 스테인리스 수납 선반이 눈에 들어왔다. 스테인리스 수납 선반은 큰언니가 고시원 방에 온 날, 근처 가게에서 사 준 것이었다. 얼마 쓰지 않아 아직도 반짝거렸다.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큰언니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언니의 목소리가 차갑게 느껴졌다. 아마 얼마 전 엄마, 아빠가 서울에 왔을 때의 일 때문인 것 같았다. 나는 곧 집으로 내려갈 건데, 책꽂이와 수납 선반이 필요하면 쓰겠느냐고 물었다.
"아니. 나 공부해야 돼."
언니의 시간을 뺏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내가 가져다줄게."
하지만 언니는 냉정한 말투로 거절했고, 나는 알겠다고 전화를 끊었다. 순간 잠시 누그러들었던 가족들을 향한 증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내가 바보였지, 그렇게 속지 않겠다고, 그들은 나를 싫어하고 나도 그들을 싫어한다고, 다시는 속지 말자고 다짐해 놓고. 집으로 돌아가도 가족들을 향한 증오는 멈추지 말자, 그들은 나와는 다른 사람들이니까.
나는 책꽂이와 수납 선반을 나 혼자 힘으로 꼭 집에 가져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낮이니까 택시를 타도 될 것이었다. 나는 짐은 택배로 부치고 책꽂이와 수납 선반은 택시 트렁크에 실어 터미널로 향했다. 구질구질한 집기들을 끙끙 거리며 들어 날라 버스를 기다렸다. 지금은 그냥 고시원에 두고 올 걸, 하고 생각하지만 그때는 무슨 의미 없는 집념이었는지 모르겠다. 결국 버스 짐칸에 두 집기를 싣고, 다시 택시에 실어 집까지 가져왔다. 택시비만 해도 그것들의 가격보다 더 나왔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다짐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다시 큰언니에게 전화를 걸지 않겠다고. 증오는 멈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