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인도행은 비자가 만료될 때까지 계속될 예정이었지만 진짜는 상상과는 달랐다. 모험적이고 신비하고 유쾌한 일만 가득할 것 같았던 기대와는 달리, 처음부터 삐걱거렸다. 일단 인도의 5월은 지독하게 뜨거웠다. 하지만 나는 주머니 사정으로 인해 40도가 넘는 온도에도 에어컨 없는 게스트하우스 방에서 천장에 달린 팬 하나에 의지해 더위를 피했다. 그 어마어마한 더위가 달랑 팬 하나로 피해질 리가 만무였다. 그야말로 찜통 같은 더위였다. 당시 나는 낮에 화장실에 한두 번 갈까 말까 했다. 땀으로 다 배출되니 소변으로 나올 것이 없었던 거였다.
나는 델리의 여행객들이 처음과 마지막에 머문다는 빠하르간지에 머물면서 인도를 하나씩 알아갔다. 처음으로 홀딱 빠진 인도의 모습 중 하나는, 바로 야채·과일 등을 파는 시장이었다. 그 이국적인 풍경이란. 나는 사이클릭샤를 타고 천천히 시장을 둘러보며 황홀경에 빠졌다.
'오기를 잘했다.'
음식은 또 어떻고. 어떤 이들은 북인도 음식에 적응을 못해 볶음밥이나 볶음면만 노상 먹는다던데, 나에게는 길거리 음식, 허름한 식당의 25루피짜리 탈리(인도식 백반)도 이질감 없이 잘 맞았다. 인도의 채식 음식을 먹으면서 나는 그 가격과 음식의 맛에 감사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물은 늘 생수만 먹었지만 언제 먹은 무엇이 탈이 났는지는 모르겠으나 말로만 듣던 물갈이를 심하게 했고, 그때부터 모든 것이 꼬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더운 날씨에도 팬을 돌리면 오한이 왔고, 음식물은 입안에서 모래알처럼 굴러다니는 바람에 도통 목으로 넘기기 힘들었다. 그렇게 2주를 지내고 나니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버렸다.
결국 나는 인도행 두 달 반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몸이 안 좋아서 일찍 돌아오는 내 걱정 때문이었는지 엄마, 아빠, 큰언니가 함께 공항으로 마중 나왔다. 그리곤 며칠 뒤, 나는 열이 펄펄 끓고, 여름임에도 겨울 이불을 꺼내 덮었지만 턱이 달달 떨릴 정도로 오한이 와 병원에 입원했다. 그 후에도 열은 계속되었고 행정고시 1차 시험 합격 결과를 기다리느라 집에 내려와 있던 큰언니가 내 곁을 지켰다. 큰언니와 가족들에게 쌓여있던 미움이 조금 사라지는듯했다. 이런저런 검사를 계속해보는 동안 다행히 열은 점차 내렸고, 의사는 불명열로 결론을 내리고 나를 퇴원 조치했다. 그러는 사이 나는 잘 맞던 청바지가 쑤욱 내려갈 정도로 살이 빠졌다.
몸은 나았지만 나는 허망한 마음에 빠져 우울했다. 어떤 마음과 각오로 향한 인도였는데 이렇게 바보같이 돌아오다니. 아니, 인도와의 인연이 이게 끝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야만 한다! 나는 다음 해 인도 델리대학교 철학과에 입학을 목표로 필요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인터넷을 뒤져 델리대학교 입학과 인도 생활에 관한 글들을 찾아 읽으면서 나는 재밌는 사이트도 하나 발견했다. 바로 언어교환 사이트였는데, 회원 가입 후 자신의 모국어와 배우고 싶은 언어, 자기소개 등을 간단히 입력하면 자유롭게 문자 채팅, 음성 채팅을 할 수 있는 유용하고도 흥미로운 사이트였다.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외국 친구와 펜팔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나와 같은 마음인 외국인 친구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을 몰라 포기했고, 그 대신에 방학이 되면 반 친구들에게 신나게 편지를 쓰곤 했다.
사이트에는 한국인과 중국인이 제일 많았다.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과 채팅을 하기에는 내 실력이 많이 부족해 주로 중국인, 한국인과 영어로 채팅을 했다. 그때만 해도 몰랐다. 내 조현병이 서서히 발현될 거란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