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이름은 알렉스였다. 우리는 언어 교환 사이트에서 처음 알게 됐고,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둘 다 텍스트 채팅을 할 때도 있었고 그는 음성 채팅을, 나는 텍스트 채팅을 할 때도 있었다. 나는 음성 채팅을 거의 하지 않았고 영어 실력도 그에 비해 많이 부족했지만, 그는 인내심 있게 내 얘기를 들어주고 내 영어를 교정해 주기도 하는 등, 우리는 즐거운 대화를 나눴다. 그는 스물아홉이었고 독일어를 배우고 있는, 독일 유학을 앞둔 중국인이었다. 우리는 흔한 사진교환도 없이 서로의 목소리와 타이핑에만 집중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여기서 문제가 시작되었다. 나는 알렉스가 사이트에 접속하지 않은 때에는 다른 여러 중국인, 한국인과도 채팅을 했는데, 언제부턴가 나의 신경이 이상하게 작동했다. 이 사람도 알렉스 같고, 저 사람도 알렉스 같은 느낌이 든 것이었다. 즉, 알렉스 한 사람이 여러 아이디로 내게 접근해 서로 다른 프로필을 내세우며 다른 사람 행세를 한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내 안에서 시작된 의심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우린 전처럼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이제 우리의 이야기는 나의 의심의 눈초리(너는 알렉스다)로 시작해, 그들(내가 다 알렉스라고 생각했던 모든 이들)의 결백 주장(나는 알렉스가 아니다,라는)으로 이어졌고, 더는 발전적인 대화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나에게 이별을 고하는 게 결말이었다. 내 의심이 깊어가자 알렉스는 노트북의 카메라를 켜고 얼굴을 보여주며, 나는 알렉스 한 사람이고, 네가 생각하는 그들은 내가 아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끝까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의 짧았던 우정은 끝이 났고, 그러는 사이 출국 날짜는 점점 다가왔다.
2008년 3월 초, 출국날이 되어 나는 다시 델리로 날아갔다. 마음 한 구석엔 언어 교환 사이트에서의 추억이 생생했고, 알렉스의 음성이 귀에서 맴돌았다. 그래도 낮에는 대학교 입학 지원서도 내고, 집도 구하고, 장도 보는 등 나름 열심히 지냈다. 나는 노트북이나 데스크톱이 없었고 인터넷을 하려면 인터넷 카페(우리나라의 피시방)에 가야 했는데, 속도도 느리고 옆좌석과 분리되어 있지 않아 한국의 내 방에서 처럼 마음껏 채팅을 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반강제적으로 언어 교환 사이트와는 단절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서서히 인터넷 친구들을 잊어갔다.
뉴델리 한가운데에 방도 구했는데, 방 2개에 작은 욕실과 주방이 딸린 독채였다. 방마다 작은 침대 2개, 총 4개의 침대가 있었는데 아직 아무도 없어서 나 혼자 독채를 쓰게 되었다. 작은 냉장고도 있었고 내가 주인에게 부탁하니 낡은 책상도 들여 주었다. 다만 에어컨을 내가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게 아니라 2층의 주인집에서 정해진 시간만 틀어준다는 점이 단점이었다. 어쨌거나 그렇게 델리를 알아가고 있을 때, 새로운 룸메이트 한 명이 왔다. 나는 성격상 가족이 아닌 다른 누구와 같이 생활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녀가 상당히 반가웠다.
그녀는 주중에는 출근을 했다. 아침엔 자신의 도시락을 싸면서 내 몫을 더 만들어 책상 위에 살포시 놓고 가는, 마음 따뜻한 친구였다. 나는 보답으로 파스타를 만들어 그녀에게 대접했다. 그녀에게 몇 가지 인도 음식을 배웠는데 그중에서 베스트는 인도식 볶음밥(?) 풀라오 pulao였다. 풀라오 만드는 법은 어렵지 않았다. 일단 인도쌀인 바스마티로 냄비밥을 해놓고(전기밥솥이 없었기 때문에) 달걀도 삶아둔다. 바스마티는 차지지 않아 밥을 해 그릇에 담으면 푸슬푸슬하고, 젓가락으로는 먹기가 불편해 숟가락을 쓰는 게 낫다. 다음으로는 프라이팬에 식용유를 넣고 삶은 달걀 겉을 튀겼다가 다른 그릇에 꺼내 놓는다. 손질한 양파, 감자, 당근, 컬리플라워 등을 썰어 넣고 익힌 다음 감자와 당근이 익었을 때 인도 향신료들을 혼합해 놓은 마살라와 큐민 가루, 강황 가루를 넣고 소금 간을 한 다음 볶다가 밥, 달걀을 넣고 볶아주면 끝이다. 후에 알고 보니 풀라오는 볶음밥이 아니라 압력솥에 재료를 모두 넣고 쪄내 익혀 먹는 밥이었다. 우리에겐 압력솥이 없었던 데다, 아마 내가 항상 냄비밥을 해서 먹는 걸 보고 좀 간편하게 하는 방법을 알려준 것 같았다. 아무튼 풀라오는 맛이 기가 막혔다. 인도에 머무르는 동안 룸메이트에게 배운 레시피대로 나는 하루에도 많으면 두 번, 적어도 한 번은 꼭 풀라오를 해 먹었다.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 맛이었다.
그녀를 알게 된 후 나는 처음으로 어둑어둑해질 저녁 무렵 외출을 감행(!)했다. 인도에 오기 전 치안에 관한 안 좋은 이야기들을 너무 많이 들어서, 그동안은 늘 밝을 때만 외출을 했었다. 우리는 근처 시장에서 야채도 사고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쇼핑몰에 있는 맥도널드에서 채식버거를 사 먹기도 했다.
가끔은 집 생각도 났다. 당시 일기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 이렇게 즐거운 곳이 세상이었나 싶을 정도로 내가 이곳에 있다는 것이 만족스럽다가도 갑자기 밀려오는 알 수 없는 감정에 한없이 집이 그립다. 그곳에 있을 때도 늘 또 다른 것을 그리워했다는 걸 안다. 나를 지치게 하고 나약하게 만들고 울게 하고 끝없이 증오를 하게 만든 곳도 그곳이었다는 것을 안다. 그곳에서도 항상 누군가가 필요했고 누군가를 그리워했다는 것도……. 하지만 이런 묘한 감정이 드는 때에는 한없이 그곳이 그립다.'
… 또 가끔은, 알렉스 생각도 났다. 날 잊지 않고 있을까. 그 따뜻했던 음성은 그대로 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