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살 인생-위기철
아홉 살에게 가혹한 매질과 가난은 불행인지 다행인지 인생의 잔인함보다는 경험을 배울 수 있게 해주었다. 아직 정착되지 않은 가치관의 걸음마에 아버지는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게끔 손을 잡아주는 보호자의 역할을 수행해주었고, 주인공 스스로 자신의 배경을 부끄러워 감추기보단 객관적인 자각과 인정으로 잔인한 현실을 타파할 수 있는 틈을 만들었다.
우리에게 어머니란 평생 잊을 수 없는 여인이자, 아버지가 가장 사랑한 존재로 남을 수 있다. 어머니의 무조건적인 헌신과 사랑은 어머니의 존재에 대한 숭고함과 단순히 자식을 가진다고 해서 가질 수 없는 부모의 자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단순히 아이를 낳음으로써 부모가 될 수 있었다면 어떤 부모가 되어야 하는 것인가를 고찰하는 진정한 부모들에게 부끄러운 감정을 가져야 할 것이다.
'나'의 존재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존재에게 슬픔을 느꼈다. 사람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처음 느낄 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수도 있다는 슬픔을 동시에 느낀다고 한다. 다소 역설적인 감정이지만, 그만큼 나를 제외한 존재를 사랑한다는 감정부터가 역설적인 것이 아닌가 싶다. 기종이의 서툴지만 순박한 애정은 고독과 외로움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
골방철학자의 뒤틀린 욕망에서 시작된 현실과의 괴리감은 지금 현대인에게 가장 많은 공감을 전해주지 않았을까. 다만 괴리감의 탈출구가 새로운 삶의 시작이 아닌 끝인 것은 아쉽게도 사랑의 부재가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골방철학자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던 '윤희'의 잘못은 아니다. 다만 야속한 타이밍이 아쉬울 뿐이다.
남자의 마음은 분석할 수 있어도 여자의 마음은 분석할 수 없다고 한 동기의 말이 떠오른다. 여자의 마음은 참 어렵다. 마치 매 초, 매 분마다 바뀌는 보물찾기를 찾기위한 여정을 떠나는 것 같은, 어쩔 땐 맞을 수도 있지만, 틀릴 때가 훨씬 많다. 남자와 여자의 차이라기 보다는 그저 여자라는 존재에 대한 파악을 어렵게 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라는 의심을 할 정도이다.
아홉살의 시각에서 바라본 하늘은 푸르른 하늘색 보다는 저녁노을이 지고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는 잿빛의 가까운 색이다. 아홉살의 시각은 다소 잔인하리만치 묘사되는 현실의 잔혹함과 부당함, 부정을 적나라하고 가감없이 바라본다. 그것에 장악된 동심은 저항이 아닌 순응 그 자체이고, 푸르른 하늘을 보지 못한 이에게 하늘은 단순히 올려다볼 필요가 없는 뒷배경에 불과하다. 마치 겪어보지 못한 이상따위는 생각해볼 수 없는 것처럼말이다.
하지만 인생은 아홉살에서 끝나지 않는다. 인생이 끊임없이 고난을 선사하고 핍박과 시련을 선물할지언정, 우리는 스스로를 고찰하며 자세를 관철하고 사랑과 믿음을 증명한다. 저자 또한 그것을 서술하며, 아홉살의 인생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태도를 보여준다.
‘~ 때문에’는 우리의 삶을 바꿀 원동력으로도 작용하지만 그것 자체가 인생은 아니라는 것이다.
인생은 기록된 역사가 아니라 일지의 한 페이지에 불과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