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알베르 카뮈
자살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라는 유튜브 쇼츠를 보고 홀린 듯 도서관으로 가서 찾은 알베르 카뮈
지하철과 버스 안에서 다 읽어버렸다.
첫 시작은 강렬했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어쩌면 어제인지도 모르겠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가? 나 또한 그랬다.
카뮈는 죽음을 장례식으로 경험하는 것이 아닌 죽음, 그 자체로 인식했다. 죽는 그 순간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우린 그랬던가?
우린 누군가의 죽음을 장례식으로 시작하지 않았던가.
배우 이선균의 죽음으로 우린 슬퍼했지만, 우리 인생에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뉴스에 나온 발인하는 모습에서 동료 배우들이 우는 장면으로 우리는 그의 죽음을 체감했다.
조금은 역겨운 누군가의 죽음을 장례식으로 시작한다는 것을 카뮈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실존과 본질에 관한 깊은 고민이 드러나는 시작이었다.
실존과 본질, 어느 것이 더 앞선 것일까
이 책에서 카뮈는 실존이 본질보다 앞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본질의 껍데기에 주목하기보다 실존함으로 얻는 가치에 우선하고 있다.
우리가 원하는 사랑이란 무엇인가. 또 결혼은 무엇인가.
뫼르소와 마리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하지만 마리의 '나를 사랑해?'라는 질문에 뫼르소는 '그건 아닌 것 같다'라고 답한다.
뫼르소는 마리에게 대한 깊은 감정이 있다.
하지만 뫼르소에게 마리는 그 이상의 존재이기에 사랑이라는 질문에 부정을 말한 것이다.
뫼르소에게 사랑이란 자신만의 사랑이었다. 하지만 '사랑한다'라고 뱉는 순간부터 그 사랑은 뫼르소만의 사랑이 아닌 일반적인 사랑이 되는 것이었다.
영속적인 것에 묶여 휘둘리고 싶지 않은 카뮈의 자유로움을 잘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뫼르소의 살인은 자연스러웠다.
충동이라고 우리가 일컫는 욕망의 표출로 아랍인에게 박아 넣은 4발의 총알은 뫼르소에게 후련함과 해방감을 선사했을 것이다. 태양빛이 너무 뜨거웠던 뫼르소에게 방아쇠를 당기지 않는 것은 철창 속 수감된 자신에게 관습이란 배식을 주는 것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태양빛이 왜 나온 건지 추가적인 조사를 해보았는데 그의 이름인 뫼르소(meursault)는 죽음(meurs), 태양(sault)가 합쳐져 탄생한 것이다.
자신의 인생에서 태양이라는 당연함 또는 자연스러움을 느낀 것이 아닌 삶의 비합리성과 부조리함을 참지 못해 해방을 위해 살인을 저지른 것이 아닐까.
자세한 이유는 나오지 않지만, 이유가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로 추측했다. 그저 행동했을 뿐이었다.
재판은 너무나도 어색하고 부조리했다. 뫼르소의 살인은 명분일 뿐, 뫼르소라는 사람에 대한 재판이었다.
어머니의 나이를 몰랐던 뫼르소, 상을 치른 후 곧바로 다음날 마리와 몸을 섞은 파렴치함.
뫼르소는 이에 대해 억울해하지 않았다. 딱히 변호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살인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느꼈다고는 나오지 않았지만, 그저 스스로를 방관했다.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이 삶이었다.
거기서 변명을 하는 것은 부조리한 현실에서 거짓말을 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뫼르소는 살인의 이유를 그저 태양 때문이라고 답했다.
배심원들을 조롱 섞인 비난을 했지만, 그들의 삶이 부조리하다고는 느끼지 못한 부분이 더욱 부조리함을 잘 느낄 수 있었다.
뫼르소는 사형을 구형받았다.
감옥에서 뫼르소는 출구가 없는 방인 삶의 축소판을 경험하며, 죽음만이 유일한 탈출구인 부조리함을 여실히 느꼈다.
영화 <전우치>에서 초랭이는 '죽음이 두려운가?'라는 화담의 질문의 '죽음이 두렵다기보다는 그 과정이 무섭다'라고 답했는데, 사실 죽음의 과정은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 단두대로 가는 길은 평탄했고, 위치 또한 높지 않았다. 그저 자리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저 죽음이기에 더욱 무섭게 느껴지고 과장되게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사형 전날 신부는 뫼르소에게 찾아온다. 신부와 뫼르소의 설전은 격정적이었고, 솔직했으며, 잔인했고, 비참했다. 우리는 신을 믿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믿는 것이 신이기를 바라는 것인가. 신의 의지와 계획이 우리를 이끈다면, 우리에게 자유의지란 존재하는 것인가. 그대 또한 죽음을 마주했을 때, 신을 울부짖으며 구원해 달라고 빌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러한 죽음 또한 신이 계획했다면, 울부짖는 우릴 보며 실소하고 있는 신을 볼 수 있다면, 우리의 존재가치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나는 종교를 믿지 않는다. 믿지 않게 됐다. 배신을 당했다기보다는 회의감이 맞는 것 같다. 나 스스로에게 더 주목하고 싶었다. 뫼르소에게 신부는 그저 삶의 부조리함을 외면하며, 구원자 뒤로 숨어 자신의 인생을 내던지는 비겁한 자에 불과했고, 그러한 죽음을 직면하는 스스로가 더 낫다고 생각했다.
뫼르소의 죽음을 암시하며 책은 끝이 난다. 하지만 끝은 암울하지만 암울하지 않았다. 그에게 죽음은 삶의 종료를 의미했고, 이는 곧 완성도 내포하고 있었다. 자신이 처형당하는 모습을 보러 오는 관중들의 야유와 비명소리는 사형이라는 제도와 관습에 묶여있는 패배자들의 불안감과 두려움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미워하고 불신하기에 사형을 하고, 법에 의지한다. 그러한 야유와 비난을 수용하며 죽음으로 삶에서 벗어나 해방감을 느끼고자 하는 뫼르소는 패배하지 않았다.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의 삶은 오히려 완성형에 가까워졌다.
뫼르소는 스스로 매우 떳떳하길 원했다.
아니, 떳떳하기보단 솔직하길 원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