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는 필연으로 보였고, 믿고 싶었던, 또는 신화적 언약의 괘로 남기려 했던 자본주의의 몰락은 오지도 않았고 올 것 같지도 않다. 영원한 삶이든 분명한 종말이든 현상의 원리에 대한 탐구가 아니고서는 둘 다 종교적 믿음의 언사일 뿐이다. 문제는 무엇이 이 영원할 것 같은 자본의 확장을 가능하게 해 왔고 존속시키고 있는가이다.
눈앞에 돈이 흩날린다. 진짜 돈이다. 모두가 돈을 좇기 위해 뛰어 나간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영원성이다. 화폐가치가 없어져 돈이 휴지조각으로 여겨지지 않는 이상 돈을 움켜쥐기 위해 사람들은 맹목적으로 달려들 것이다. 흩날리는 지폐 한 장에 얼마의 가치가 있나를 따져 묻는 우스운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저 더 많이, 옆에 있는 자보다 더 많이, 이왕이면 제일 많이 얻으려 할 것이다.
자본의 역사적 관점에서 화폐가치는 줄곧 하락해 왔다. 리디노미네이션(화폐개혁)이라는 인위적 개입이 아니고서는 지폐에 찍혀 있는 0의 숫자는 항상 늘어왔다. 단순한 수요와 공급의 원리에 따라 돈을 많이 풀면 돈의 가치는 그만큼 줄어드는 것이다.
금융공황 또는 파산공황 같이 예외적인 상황, 앞날이 어떻게 될지 불안해서 모두가 돈을 움켜쥐려고만 하여 화폐가치가 상승하는 경우는 역사에 몇 번 없었으며 일시적이다. 그리고 아주 오래전, 금본위제와 그 이전 시절, 자본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정책 입안자들이 낡은 경제적 도그마에 사로잡혀 그들의 우둔함에 의해 오랜 기간 부적절하게 긴축적 통화정책을 펼칠 때도 있었다. 이와 같은 시기를 제외하고는 화폐가치는 줄곧 하락해 왔다.
그리고 이러한 사태는 화폐가치 하락에 대한 관성적 기대를 만들어 오며 경제를 성장시켜 왔다. 왜냐하면 화폐가치 하락의 기대는 일반적으로 투자를 촉진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금리인하하면 주가가 올라가는 원리다. 돈을 푼다. 투자를 한다. 투자를 자극하여 고용이 촉진된다. 현상 그 자체를 직관적으로 이해해 보자. 돈이 뿌려진다. 사람들은 그 돈을 잡기 위해 열심이다. 지폐 한 장의 가치가 얼마가 되든가에 가치가 있다고 믿는 이상 더 많이 뿌릴수록 더 많이 잡으려고 아우성일 것이다.
자본이라는 추상명사에 한 개라는 단위의 양적속성을 부여해 보자. 자본 한 개가 벌어 들일 수 있는 수익은 자본을 더 많이 투입할수록 줄어들 것이다. 이는 자본의 한계효율이 줄어든다고 말한다. 모든 성장이 초반에는 폭발적이다 후반에는 쇠퇴하는 이치와 동일하다. 여기서 자본확장의 지속성을 추론해 볼 수 있는 지점이 있다. 자본에 대한 총수익은 자본의 한계효율과는 아무런 직접적 연관이 없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마진이 줄어들어도 돈은 계속 벌어 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이 자본확장의 영원성을 근거 짓는 요점이다.
영원할 것 같은 자본의 확장 속에 경제상황은 제로금리에 가까워졌고 국가 성장률을 훨씬 초과하는 양적완화도 진행 중이다. 자본주의 몰락의 필연성을 부르짖는 자들은 자본이 한계효율의 끝자락에 도달했을 때 마진의 감소분을 상쇄하기 위한 무절제한 탐욕에 따른 공급과잉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자본주의 번영의 영원성을 찬양하는 자들은 화폐 그 자체에 대한 변함없는 욕망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화폐가치는 줄곧 하락해 왔다. 물건 하나 사는데 필요한 지폐에 새겨진 0의 숫자는 줄곧 늘어왔다. 돈은 뿌려지고 물가는 올라가고(인플레이션) 우리는 돈을 잡으려고 열심히 일한다(경기성장). 그 뿌려진 돈이 가치가 있다고 믿기에 더 많이 뿌릴수록 더 많이 일했다. 적당한 흥분 속에 건강한 삶이 유지되듯이 경제는 오랜 역사동안 적당한 인플레이션 속에 등귀하는 경기성장을 이루어 왔다. 그 전제조건은 화폐에 가치가 있다는 확신이다. 즉 내가 일하는 만큼 소득은 등귀할 것이라는 확신이다.
만일 눈앞에 돈이 종이쪼가리라는 불신이 싹트기 시작하면 근로의욕은 감소하며 영원성에 대한 환멸의 시작점이 되는 것이다. 그 후가는 자명하다. 제3세계국에 대한 착취의 확대 없이는 잉여의 제한 속에 소비지출의 감퇴가 고용의 축소로 이어지며 자본의 한계효율의 낮아짐은 탐욕의 증폭을 불러올 것이다. 그리고 더욱 빈번하고 주기적인 공급과잉이 결과다.